안향002 소수서원 경내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 [사진 제공=영주시청, 소수박물관]
안향002 소수서원 경내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 [사진 제공=영주시청, 소수박물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75년(충렬왕 원년), 안향은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다. 벼슬길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지방관에 임명된 안향은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서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하는 치적을 쌓았다.

원나라의 탄생과 일본 원정

몽골과의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토속신앙인 무교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유교를 공부한 안향은 무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배척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고려사(高麗史)』는 안향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충렬왕 원년에 상주판관이 되었다. 그때 요괴를 받드는 여자 무당 세 명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공중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자 다들 앞을 다투어 엎드리고 수령도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무당들이 상주에 이르렀을 때 안향이 잡아서 곤장을 치고 칼을 씌우자 무당들은 ‘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지만 안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마침내 무당들이 잘못했다고 애걸하는 바람에 사건 은 일단락되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상주판관으로 재직하면서 쌓은 치적이 안찰사에 의 해 보고되어 판도사 좌랑(정6품)으로 승진한 안향은 조정으로 복귀했다. 이듬해에는 내시감 감찰시어사(종5품)를 거쳐서 국학(國學)의 국자사업(종4 품)에 임명되어 나라의 유교교육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國子監)은 1275년 충렬왕 때 국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298년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가 1308년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바뀌었다. 이후 몇 차례 더 이름이 바뀌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성균관으로 정착되었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불교를 국가신앙으로 삼아왔다. 민간에서는 무교가 토속신앙으로 전해져왔다. 교육과 인재 등용을 책임지고 있던 유교 는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이에 안향은 국학을 다시 부흥시켜서 나라의 교육을 바로 세우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10여 년 동안 국학에 근무하면서 학문을 진작시키는 일에 몰두했던 안향은 1288년(충렬왕 14년) 첨의부 우사의대부(정4품)를 거쳐 밀직사 좌부승지 대부관위(정3품)가 되었다. 첨의부는 고려 후기 국가행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청이었다. 첨의부 관리가 되었다는 것은 국가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올랐음을 뜻했다.

1289년(충렬왕 15년), 마흔일곱 살의 안향은 정동행성(征東行省) 원외랑에 임명되었다. 정동행성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 고려에 설치했던 관청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북방초원에 근 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속령으로 삼았던 유목국가였다. 끊임없는 약탈과 수탈로 경제적인 요구를 충족해오던 몽골은 유목제왕과 유목봉건영주계급,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 적 모순과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골치를 앓았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유목제국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서 제국을 지속시키려고 했다. 수도를 몽골 고원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 지금의 중 국 베이징, 허베이, 톈진, 네이멍구자치구 등의 지역을 총칭)에 있는 연경으로 옮겨서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관료국가를 세우려했다.

1271년, 몽골은『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명명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했다. 뒤이어 1274년부터 1279년까지 화이허 강(淮河) 이남 지역의 남송(南宋)을 평정하여 마침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로까지 눈을 돌린 원나라는 고려를 압박해 서 1274년(원종 15년)과 1281년(충렬왕 7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태풍과 해전에 미숙한 탓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정동행성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 정식 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으로 ‘정동’은 일본 정벌을 뜻하며,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中書省)의 지방파견기관을 뜻했다.

고려에 성리학을 들여오다

정동행성에 근무하면서 원나라와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던 안향은 좌우 사낭중을 거쳐 유학제거사의 최고책임자인 유학제거가 되었다. 원나라가 정동행성의 속관으로 설치한 유학제거사는 학교, 제사, 교양, 전량(錢 粮), 저술 등의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안향이 초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정동행성이 정치적 행정적 통제기관이라면 유학제거사는 문화적 사상적 통제기관이었다. 안향은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동행성과 유학제거사 등의 기관에 연달아 일하면서 원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289년(충렬왕 15년) 11월, 충렬왕은 원나라 출신의 왕후 제국대장공주와 세자(훗날 충선왕)를 데리고 원나라 방문길에 올랐다. 안향은 몽골어에 능통한 장군 조인규, 몽골 출신의 귀화인 인후, 고려 조정의 대표 지도첨의사 염승익 등과 함께 임금을 수행했다.

원나라 수도 연경에 도착한 안향은 이듬해 3월 귀국할 때까지 5개월 동안 책에 파묻혀서 지냈다. 이때 주자의 학문을 처음 접한 안향은 성리학이야말로 ‘유교의 정맥’임을 깨닫고 귀국할 때 많은 주자서와 함께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왔다.

당시 충렬왕의 원나라 행차는 외교적인 방문이 아니라 왕후의 본가, 충렬왕에게는 처가를 방문하는 사적인 일이라는 이유로 원나라는 사관의 동행을 불허했다. 때문에 안향이 주자의 학문을 접하고 주자서는 고려로 들여온 상세한 경위는『고려사』에 남아 있지 않다. 오직『회현선생실기』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연경에 머물면서 주자서는 손수 옮겨 적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했다. 당시는 주자서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생은 이를 처음 보고 몹시 좋아하면서 ‘공자 학문의 정맥’임을 깨달았다. 손수 베낀 주자서와,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시고 돌아온 선생은 이를 연구하여 널리 알리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안향은 밀직사의 부밀직사사(정3품)로 있으면서 성리학을 꾸준히 연구했다. 밀직사는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軍 機)의 정사 등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첨의부와 함께 국가의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1294년(충렬왕 20년) 4월, 동밀직사사(정2품)로 승진한 안향은 합표(合浦: 지금의 경남 마산)에 부임했다. 합표는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성 지휘 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백성들의 수탈이 심해서 피해가 큰 지역이었다. 한때 정동행성 일을 맡아했던 안향은 일본 정벌준비로 많은 부담을 지는 바람에 생계에 타격을 입은 백성들을 구휼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해 7월, 안향은 지공거로 임명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지공거 는 과거를 관장하는 최고책임자 자리로, 고위관직자 중에서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 주로 맡았다. 당시 조정에서 안향의 학문과 인품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지공거로 있으면서 그해 10월의 과거를 주관한 안향은 윤안비 등 33명의 인재를 등용시킨 다음 다시 밀직사로 복귀해서 국가 운영의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다음 회에 계속)

키워드

#안향 #성리학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