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헌 김담의 묘소 아래에 지은 빈동재사.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무송헌 김담의 묘소 아래에 지은 빈동재사.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뉴스퀘스트=(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담은 1445년 이조정랑을 거쳐 제언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이순지와 함께 언제 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47년 승문원부교리로 있으면서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편찬했으며, 1448년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해서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책임자가 되었다.

부친상을 맞자 여섯 차례나 상소하다

그 무렵 김담은 문과 중시(重試: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 응시했는데,을과 1등 3명 가운데 2등을 차지했다. 이때 1등은 성삼문(成三問)이었고 3등은 이개(李塏)였다.을과 2등 7명은 신숙주(申叔舟), 최항(崔 恒),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등이었다. 당대의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김담의 학문은 뛰어났던 것이다.

1449년(세종 31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담은 3년 동안 시묘를 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해 5월, 세종은 국사가 시급하니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특명과 함께 쌀 10석, 옷, 신발, 버선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김담은 지금은 아버지 상을 모시는 게 중요하므로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신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 태어나 임금의 은혜를 입고 관직이 4품에 이르렀습니다. 헤아려 보건대 지금 신하들 중에서 비록 귀척(貴戚)이나 훈구(勳舊)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신처럼 성은을 입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몸이 상하고 머리가 부서질지언정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을 갚아야 할 터인데, 어찌 감히 정을 숨기고 말을 꾸며서 성총(聖聰)을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아버지는 생시에 봉양하지 못하고, 병중에 의약도 지어드리지 못했으며,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 도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피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건대 묘소 곁에 엎드려 삼년상을 마치려는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보상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늘날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부디 통촉해주시옵소서.”

“신의 가정이 액운을 만나서 신의 백부가 지난해 9월에 돌아가시고 11월에는 신의 누이도 죽고 올해 정월에는 신의 어미가 병환으로 위독해서 미처 쾌차하기도 전에 신의 아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신의 여식은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2월에 죽었습니다. 신의 집안이 이 지경이온데 부디 향리로 돌아가서 상제(喪制)를 마치고 집안을 수습하고 노모를 봉양하도록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그해 7월까지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승진시키면서 복귀하라는 명을 계속 내렸다. 사간원에서도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벼슬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세종을 대신해서 정무를 보던 세자(훗날 문종)가 “김담이 집에 있을 때는 상복을 입고 관청에 있을 때는 평상복을 입으면 되지 않겠는가. 역법에 정밀한 사람이 김담밖에 없기 때문에 임용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임금과 세자가 모두 김담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하기 전에 불러서 관직에 쓰는 것)의 명을 따라서 복귀한 김담은 천문역법 연구에 다시 매진하게 되었다.

1451년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배척하는 소를 여러 번 올렸다. 1452년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충주목사로 나갔다. 충주목사로 있을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서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했는데 김담이 이를 잘 다스려서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1456년에는 안동부사, 1458년에는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1463년(세조 9년), 세조에 의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김담은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7월,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면서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철시(撤市)할 것을 명했다. 또한 예관(禮官)을 보내서 조제(弔祭)를 치르게 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렸다. 아울러 별세한 이튿날 ‘문절(文節: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한다고 ‘문’, 청렴함을 좋아하고 사욕을 이긴다는 ‘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후 이틀 만에 시호를 내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만큼 김담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일찍이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방문하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했다. 그것이 저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몽유도원도」에는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정인지(鄭麟趾) 등의 제찬(題讚)을 포함한 23편의 자필 찬시가 들어 있다. 김담 도 그중 한 사람으로「몽유도원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푸른 숲 사이 백옥처럼 맑은 물 흐르고(碧玉叢間白玉流)

꽃빛은 물 위에 길게 비치며 떠 있네(花光長帶水光浮)

맑고 그윽한 자연은 인간 세계가 아니었던가(淸冥風露非人間)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운 꿈속에서 노닐었네(骨冷魂香夢裏遊)

한 조각 도원을 한 폭에 그려놓으니(一片桃源一幅圖)

산중의 선경이 비단 위에 사뿐히 실려 있네(山中上較銖)

무릉에서 길 잃은 자에게 묻노니(試問武陵迷路者)

눈앞에 보았던 게 꿈만 같지 않던가(眼中還似夢中無)

김담은 조선 전기에 활약했던 문신이자 천문학자였다. 갓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세종에게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이순지와 함께 15세기 최고의 역서(曆書)로 평가받는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는 등 조선 천문역법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또한 17년 동안 집현전에 재직하며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각종 예법을 개정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기 여했다. 벼슬은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는 등 공직자로서도 모범적인 삶을 산 인물이었다.

천재발명가 장영실과 김담의 인연

장영실(蔣英實)은 조선이 낳은 천재 과학자 중 한 사람이다.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측우기 등 뛰어난 발명품을 숱하게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고 그의 훌륭한 업적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삶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장영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출생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세종의 총애를 받은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 즉 노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 원나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한다. 『아산장씨세보』에 의하면 장영실은 중국 항주 출신 장서의 9세손이며 아버지는 장성휘라고 한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고려시대 때 중국 송나라 에서 이주하여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이었던 것이다. 『아산장씨세보』에는 장영실이 어떻게 해서 관노의 신분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아버지 장성휘가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어머니와 자식들이 관노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장영실은 다문화가정 출신으로 과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산장씨세보』에는 장영실의 사촌여동생이 김담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영실은 세종이 즉위(1418년)하기 이전부터 궁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김담은 143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비록 신분의 차이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업무에 관해서는 장영실이 김담보다 한참 선배였다. 이순지와 함께 세종의 천문학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던 김담이 자격루를 발명하는 등 이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장영실과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나이 차이는 있지만 과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두 사람은 쉽게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상대방을 인정했기 때문에 장영실은 자신의 사촌여동생을 김담에게 소개해주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장영실의 뛰어난 재주와 빛나는 공적, 그리고 세종의 남다른 관심을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대 사업 때문에 명나라와 외교문제가 발생해서 장영실을 보호해야 했다는 설과, 세종이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끝나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서 버려졌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인문학이 환영을 받았던 조선시대에 김담과 장영실 같은 뛰어난 인재가 과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축복과도 다름 없는 일이다.

* 참고자료 : 「무송헌 김담의 생애와 시문 연구」, 『인물과학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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