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연(1913-1987) 서도명창 김정연, 국가무형문화재 제 29호. 생전에 심가를 잘 불렀다.
김정연(1913-1987) 서도명창 김정연, 국가무형문화재 제 29호. 생전에 수심가를 잘 불렀다.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서도소리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달한 우리의 전통 소리를 말한다. 서도소리에는 민요, 잡가, 입창(立唱), 재담소리, 송서(誦書), 시창(詩唱)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서도소리의 대표는 역시 <수심가>다. <수심가> 노랫말은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수심가>의 유래에 대해서는 서북인의 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의 기생 부용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노랫말을 살펴보면 시(詩)에서 여기저기 두서없이 차용한 흔적이 보이는 점, 한문 문투의 혼합적 사용이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오랜 세월에 걸쳐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기방(妓房) 등에서 구전되면서, 소리하는 자에 따라 변형되고 증편에 증편을 거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아리랑>처럼 <수심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오래도록 구전되면서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서도 소리 명창들이 수심가를 시창할 때 보통 가장 먼저 부르는 "약사몽혼으로 행유적이면, 문전석로가 반성사로구나"는 이옥봉의 시 「몽혼(夢魂)」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 노랫말은 7언 4행의 한시(漢詩)다. 원시(原詩)와 번역은 다음과 같다.

몽혼(夢魂)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니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요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이면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로다

요사이 우리 님은 어찌 지낼꼬

달 밝은 창가에서 님 생각 한이 많아

님 그려 오가는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님의 집 문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우리 국악의 노랫말이 시조를 제외하고는 지은이가 불분명한 것이 대부분인데, <수심가>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의 경우 작사가가 확연히 밝혀진 것이다. 그럼 이옥봉은 어떤 사람인가?

이옥봉은 조선 선조 때, 즉 이순신장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여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媛:1544 ~1595)의 소실, 즉 첩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관직에 오를 경우 첩실을 두는 것이 그다지 흠이 아니었다. 이순신장군을 예로 들어보면.

장군은 28세 되던 해 무과에 응시했지만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왼발을 다치고 낙방했다. 그 후 무예를 닦아 32세 되던 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라는 하급 장교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때 당시의 병조판서 김귀영이 매파를 보내 장군에게 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서녀, 즉 첩실의 딸을 첩실로 들이라는 거였다. 이때 장군은 단호하게 거절을 한다. 자신 상관의 딸이기에 첩실로 맞을 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병조판서는 요즘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국방부장관의 사위가 되는 건데, 보통 사람 같으면 얼씨구나 이게 왠 떡이냐 하고 받아들였을 거지만 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다고 이순신장군에게 첩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조원이라는 사람도 그랬다. 이옥봉은 아버지 이봉에게 당대에 뛰어난 인물에게 시집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조원은 21세 때 율곡 이이와 같이 과거에 응시했는데 진사시(시, 부)에서 1등을 했다. 율곡은 생원시(경전)에 1등을 했다. 한마디로 조원은 전도가 양양한, 출세가 보장되었던 실력파였던 것이다. 옥봉의 아버지가 아마도 매파(중신애비)를 넣어, “내 딸을 자네 첩실로 삶게”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때가 조원이 대과에 급제하고 관리로 나아가기 직전인 29세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럼 옥봉의 나이도 대충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결혼 적령기가 18세 정도였으니, 옥봉이 조원보다 대략 10세 정도 연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봉은 다시 조원의 외할아버지에게 부탁을 하고, 이 외할아버지가 조원을 불러 첩실을 들이는 것은 흠이 아니다 하여, 이 결혼이 성사가 된다.

옥봉은 조원의 첩실이 된 후 여러 시를 남기는데, 아주 깔끔한 솜씨를 자랑했다. 조원은 용모도 빼어나고 문재(文才)도 뛰어난 옥봉을 매우 사랑했던 것 같다. 조원이 외직으로 돌 때 옥봉을 데리고 가 함께 살았으며, 친구들과의 주석(酒席)에도 옥봉을 대동한 적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가 조원에게 글을 부탁했다. 그런데 미처 조원이 글을 짓지 못했다. 글을 부탁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글을 독촉햇다.

그러자 옥봉이 조원을 대신해 “남산의 스님에게 빗을 빌리시는 게 낫겠지요(何不借梳于 南山之僧耶).”라고 했다고 한다. 스님은 머리카락이 없으니 빗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 스님에게 빗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인데, 불가능한 것을 조른다고 빗댄 것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로 글을 얻으러 온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옥봉은 성격이 활발하고 매우 적극적이며, 조원도 그녀의 이런 성정을 잘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원과 친구 사이였던 윤국형은 『문소만록』에서 이옥봉을 두고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백첩선(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는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이옥봉의 모습에 대한 거의 유일한 당대의 기록이다.

옥봉은 병마사에게 주는 시를 짓고, 목사 서익의 소실에게도 감사의 시를 써서 보내고, 단종의 능에 가서는 단종을 위로하는 시를 짓는 등 활달한 시작 활동을 하며 시재(詩才)를 자랑했다. 하지만 옥봉의 행복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생활은 한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

조원의 관직 생활을 보면, 1575년(32세) 사간원 정언(정 6품), 1576년(33세) 이조좌랑에 올랐다. 이조좌랑은 정 6품이나 이조정랑과 함께 ‘전랑’이라 불리며 문관의 등용과 승진을 맡아보는 인사 실권자다. 자신이 후임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 조선조 관직의 꽃이라 불리는 자리다. 과거에서 일등을 했고, 이조좌랑을 거쳤으니, 당상관은 물론 정승까지도 노려볼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578년(35세) 자신의 친척을 관리에 임용했다고 탄핵을 받아 이조좌랑에서 물러난다. 바로 이때가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처절한 싸움이 시작될 때였다.

조원은 서인이었다. 막 관료가 된 조원은 서인을 대표해 동인을 공격하다가 동인의 반격을 받고 좌천된 것이다.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조원은 지방 관리로 떠돌게 된다. 35세부터 46세까지 괴산현감, 삼척부사, 성주목사 등 외직을 전전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48세 때, 임란 1년 전인 1591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한다. 사헌부란 요즘으로 치면 검찰.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이고 집의는 바로 그 아랫자리니, 검찰청 서열 2위 자리에 복귀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큰 사건이 발생한다. 파주에 조원의 조상 묘가 있는데, 그 묘지기가 소도둑 누명을 쓴 것이다. 조선시대 소도둑은 사형 당할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한다. 옥에 갇힌 묘지기를 대신하여 그의 아내가 다급하게 조원을 찾아왔다. 마침 조원이 출타중이고, 사정이 촌각을 다투는지라, 옥봉은 시를 한 수 적어 묘지기의 아내에게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파주 목사에게 가지고 가면 될 터이다.”

그 서찰을 본 파주목사는 묘지기를 풀어주었다. 도대체 어떤 시였을까?

원통함을 아룁니다(爲人訟寃)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

세숫대야로 거울삼고

맹물을 기름삼아 머리를 빗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남편이 어찌 견우일까요

이 시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 설화 속에서 견우와 직녀는 서로 부부라는 것, 둘째 남편 견우(牽牛)의 한자(漢字) 뜻은 소를 끈다는 뜻. 즉 소도둑이라는 말이다. 종합하면 머릿기름도 없이 청빈하게 사는 여인이 직녀가 아니라면, 그 남편도 견우, 즉 소도둑이 아니다, 라는 뜻이 된다.

이 시를 본 파주목사는 묘지기를 석방했을 것이다. 시의 내용에 감동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헌부 집의의 아내가 파주목사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파주목사에게는 큰 압력으로 작용했을 수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 검찰청의 2인자의 지방 경찰에 압력을 넣어 중죄인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다.

요즘 같으면 바로 파면이 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특검을 하자고 난리 났을 거다. 고위 관료의 아내가 압력을 넣어 범인을 풀어주었다? 진범이다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조원의 입장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앞날이 전도양양했던 벼슬아치가 동인의 탄핵으로 10년을 외직으로 떠돌다가 겨우 한양으로 와서 사헌부 집의가 되었는데, 집에서 아녀자가 사고를 치고 만 셈이 된 것이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다만 조원 집안의 기록인 『가림세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씨를 불러 쫓아내면서 말하기를 “자네는 나와 여러 해 동안 지냈지만 일찍이 실수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백정의 처를 위해 시를 지어 주어 감옥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여 남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는가? 이는 그 죄가 커서 어쩔 수 없으니 즉시 자네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다. 이씨가 울면서 빌었으나 공은 끝내 듣지 않으셨다. 이씨가 마침내 공을 다시 모시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결국 정치적인 이유로 조원은 이옥봉을 내쳤던 것이다. 이옥봉은 친정으로 돌아간 후 애절한 시 <몽혼(夢魂)>을 섰다고 ‘이옥봉 행적’은 기록하고 있다.

이옥봉은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이옥봉은 임진왜란 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옥봉 죽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이옥봉 행적’에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뒤에 임진왜란을 만나 이씨는 마침내 절개를 지키던 중에 죽게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시를 몹시 기이하게 여기고 그의 정절 또한 중히 여겨 그의 글을 골라 <열조시집> 에 싣고 규수 옥봉 이씨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 “한림 승지 조 아무개의 첩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죽었다”고 했다.

이옥봉은 대략 약 40세의 나이로 난리 통에 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해동역사』에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함락하자 궁권(宮眷)들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벼슬아치 족속들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부인들 가운데 사절(死節)한 사람이 아주 많았다. 승지학사(承旨學士) 조원의 첩인 이씨 역시 이때 죽었다. 이씨는 시문을 잘 짓고 아름다웠으나 아들이 없었다.

자호를 옥봉주인이라 하고는 허경번(許景樊:난설헌)과 한묵(翰墨)을 주고받으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바 이 역시 이옥봉이 임란이 나던 바로 그해(1592년)에 이옥봉이 죽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결국 이옥봉도 당쟁, 혹은 정치적 희생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조원은 1592년(49세) 임진왜란 발발하자 선조의 몽진을 수행했고, 1593년(50세) 승정원 동부승지 임명(정 3품)되었다. 하지만 중국황제의 서찰을 개인적으로 간직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1595년 병사했다.

이옥봉은 허난설헌과 황진이에 버금가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호방할 때는 호방하고 섬세할 때는 섬세했다.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고 슬픔은 찬연하다. 조원의 후손이 “아아! 빙옥과 같은 지조, 비단으로 수놓은 뱃속에 쌓아 입 열어 시 읊으면 찬연히 무늬 이룬다. 재주 때문에 당한 어려움을 만난 뒤 규방 속에서도 문명 얻었으니 진실로 기이하도다.”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이옥봉, 그녀는 자신이 지은 시의 연못으로 스며들어갔다(玉峯涵詩池).

그러한 사정을 알았는지 이옥봉의 한스러운 노래를 담아 <수심가>로 불렀고, 그 노래는 지금까지 서도소리로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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