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학문, 예술, 문화, 사회, 경제 등 과학 분야와 자연 및 인간의 활동에 따른 일체의 지식을 압축 정리해서 각 사항을 가나다순(또는 알파벳순)이나 분류순, 또는 기타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엮은 책을 백과사전이라고 한 다.

현대의 백과사전은 근대 유럽문화의 산물로 최신 지식을 망라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430년 전에 탄생한 『대동운부군옥』

동양의 중국에서는 경서(經書)를 숭상하는 유학의 전통에 의해 경서의 내용이 과거시험에 출제되었다. 때문에 고전의 주요 내용을 발췌하고 주석을 모아서 유형별로 분류한 유서(類書)를 중요시 여겼는데 이것이 곧 백과사전이었다.

원나라 때 음시부(陰時夫)가 편찬한 20권짜리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韻)에 따라서 배열한 것으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유서이다. 현재 통용되는 운서 중에는 이 책을 모방한 것이 많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적지 않은 유서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는 1554년(명종 9년)에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2권짜리 『고사촬요(攷事撮要)』이다.

어숙권은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도 뛰어나서 한때 율곡 이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1589년(선조 22년)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목판.
1589년(선조 22년)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목판.
1589년(선조 22년)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목판.
1589년(선조 22년)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목판.

1589년(선조 22년)에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본격적인 의미의 백과사전이다.

20권으로 이 루어진 『대동운부군옥』은 그때까지 발간된 우리나라와 중국의 주요 문헌 중에서 우리나라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에 관해 기록 되어 있는 내용을 수집하여 운별(韻別)로 정리해놓은 책이다.

책머리의 「찬 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에는 ‘중국제서(中國諸書: 중국에서 펴낸 책)’로 『사기』와 『한서(漢書)』등 15종을, ‘동국제서(東國諸書: 우리나라에서 펴낸 책)’로 『삼국유사』, 『계원필경(桂苑筆耕)』등 174종의 책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엄청난 시간과 수많은 인력과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작업이다.

하물며 430여 년 전에 혼자서 20권짜리 백과사전을 편찬했다는 것은 경이로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대단한 작업을 이루어낸 권문해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권문해(權文海)는 1534년(중종 29년)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권지(權摯)와 어머니 정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문해의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자는 호원(灝元)이고 호는 초간(草澗)이다.

예천 권씨는 고려 중기에 뛰어난 문인 임춘을 배출한 예천 임씨, 조선 초기에 대사성을 지낸 윤상을 배출한 예천 윤씨와 함께 예천 지방의 대 표적인 사족(士族)이었다.

조선시대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권맹손과, 김종직의 제자로 집현전 교리를 지낸 권오복 등을 배출하면서 예천 권씨는 학문을 숭상하고 절개를 지키는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권오복은 김일손 등과 함께 참형을 당했으며, 형제들은 귀양을 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풀려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권문해의 아버지 권지는 자식들에게 늘 의로움을 기준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와 오랫동안 예천지역에서 재지세력으로 성장해온 가문의 배경은 권문해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권문해의 학문은 가학(家學)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 였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으로부터 비롯된다.

권오복의 외조부 이계전은 이색의 손자이자 권근의 외손자였다. 이계전은 권오복의 종조부인 권 맹손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색과 권근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오복의 학문과 사상은 권문해의 종조부 권오기와 아버지 권지를 거쳐서 권문해에게로 이어졌다. 이를 거꾸로 추적해보면 권문해의 학문은 권오복을 매개 로 하여 이색과 권근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권문해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권오복이다. 권문해는 권오복의 동생 권오상의 손자였으므로 권오복과는 종조부와 종손자의 관계이다.

권오복은 문장과 절의가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말았다. 권문해는 권오복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감정이 격해져서 한숨을 짓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무오사화와 권오복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에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가 류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서 일어난 사화로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함께 조선시대 4대 사화로 불린다.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김종직 등 사림파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정인지 등 세조의 공신들을 무시하는가 하면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서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김종직은 남이(南怡) 장군을 무고해서 죽인 자라는 이유로 훈구파의 류자광을 비판했다.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는 관아에 걸려 있는 류자광의 시를 떼어내서 불태우기도 했다. 이런 일로 류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다양한 모습으로, 사진은 초간정 원림.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다양한 모습으로, 사진은 초간정 원림.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다양한 모습으로, 사진은 초간정 원림.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다양한 모습으로, 사진은 초간정 원림.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은 훈구파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세조비 정희왕후의 국상 때 기생과 어울렸다는 비리를 직필함으로써 악연을 맺었다.

이에 이극돈과 류자광은 합세해서 김종직 세력에게 보복을 하려고 했지만 성종 때는 김종직 세력이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었다. 1498년 『성종실록』편수관으로 있던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끼워 넣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위한 사건을 비유하면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일을 풍자한 글이다.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한 이극돈은 류자광에게 이 사실을 알렸 고, 류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서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한 것은 대역죄라고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당시 방종과 사치행각을 일삼고 있던 연산군은 자신의 행태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림파를 무척 싫어했다.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을 일삼는 학자와 문인들은 증오하고 자신에게 아부하고 추종하는 자들만 좋아했다.

류자광의 상소를 계기로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신문한 끝에 「조의제문」 사건은 김종직의 교사로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대역죄로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능지처참의 형벌을 내렸다.

권오복은 1486년(성종 1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문장이 탁월하고 필법도 뛰어나서 일찌감치 사관으로 발탁되어 일하다가 무오사화를 당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권오복은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어릴 때부터 권오복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던 권문해는 그의 문집 『수헌집(睡軒集)』을 발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종조부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권문해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 종직과 그의 문하생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수헌집』 발문을 써달라고 류성룡에게 부탁했다.

이에 류성룡은 무호사화의 참혹했던 상황과 권문해가 『수헌집』 발간을 위해 노력한 정성 등을 담은 발문을 써주었다.

『수헌집』 서문을 쓴 박승임은 권오복의 문장에 대해 “하늘을 비추면 북두성을 쏘고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낼 것 같”다고 극찬했다. 이처럼 절의를 중시하고 문장이 뛰어났던 권오복의 기질은 권문해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