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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⑪] 늙은 몸이라도 나라를 구한다면 '심성지'(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⑪] 늙은 몸이라도 나라를 구한다면 '심성지'(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2.15 0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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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무수히 많은 날을 전장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패에 따라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과 땅을 오갔다.

전투에서 승리한 날은 기쁨에 취해 들떠 있었고, 패배한 날은 자책하느라 풀이 꺾여 있었다. 그런 날이면 청 송의진 의병대장 심성지는 의병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수많은 의병 사이에 섞여 앉은 심성지는 주변을 살피고 돌연 운을 뗐다.

의병의 강제해산, 노병의 눈물

담에 올라 세 번 피로서 맹세를 밝히니 함께 나라 걱정하는 인심이 성을 이루었네

오랑캐의 괴수가 감히 천지에 떨치니

의리는 해와 별처럼 밝네

죽는 것 역시 죽을 만한 일을 만나기 어렵고

살아도 구차하게 살고자 할 것은 아니네

밤낮으로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니

어찌 계소를 얻어 왜적을 흩을까

밝은 달이 즉석에서 칠언절구의 시를 읊는 심성지를 비추었다. 수많은 의병이 심성지의 시를 경청하는 한편, 일부는 꿈을 꾸듯 눈을 감았다.

‘밤낮으로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니’라는 구절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성지가 결연한 표정으로 영야음(營夜吟)1)을 읊고 나자, 화답하듯 다른 의병들이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의리에 항복하고 충성을 다하니 사리가 밝고, 흰 깃발, 밝은 그림자 성에 둘러있네. 땅의 형세 동쪽에는 많은 궁노 엎드렸고, 천공인 북두성은 뭇별이 따르네.

군사 진영 총 기운 먼저 죽길 본받고, 장수의 장막에 영웅도략은 후생을 생각하네. 원하건대 그 운데 허실의 책략을 듣고, 경양인 적을 물리쳐 명성을 떨치네.

이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의병들을 불러 모은 심성지는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대신, 첫 운을 뗐다. 심성지가 칠언절구 시를 지어 보이면, 서기, 참 모, 포병 할 것 없이 서툴지만 정성껏 답가를 읊었다. 그 사이 봄비가 그 치고 동이 트는 날도 있었다.

이 같은 기록은『적원일기(赤猿日記)』속에 ‘밤에 병영(兵營)에서 시를 읊음’이라는 뜻을 지닌 ‘영야음(營夜吟)’에 수록돼 있다.

『적원일기』의 ‘적원’은 붉은 원숭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12간지 중 원숭이띠는 ‘신’에 해당한다. 이에 적원은 해당 지가 기록된 병신년을 의미한다.

적원일기는 1886년 3월 2일부터 85일간의 청송의병단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는 청송의병들의 출신성분과 활동방식, 위치 및 역할 등을 적은 것으로, 의병에 참가한 이들의 훈련모습뿐만 아니라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일기는 청송의병에 참여한 양반들의 인적사항과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운영하는데 들어간 운영자금까지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일례로 일기에 따르면 상시근무병인 대장소 근무자 65명은 일일 1냥을 받았고 각 지역에 파견된 병사 48명은 매월 이틀간 근무하면서 2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송의진 창설 당시, 양반들이 초기 자금 3000냥을 십시일반으로 냈다는 점인데, 3000냥은 한옥 두세 채를 사고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적원일기』는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지다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구한말 의병운동을 연구하는데 귀 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청송지역 양반은 곳간을 털어 의병을 지원하였고, 주민들은 곤궁한 살림에도 금전적 지원을 이어가거나 병사로 가담하였다. 누구보다 청송 지역 주민들의 바람을 잘 알고 있던 청송의병장 심성지는 의병단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전투태세를 이어갔다.

감은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에 출진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연합군은 본진을 해산하고, 진영을 분산했다.

그러나 청송의진은 의성·이천의진이 수세에 몰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6월 15일 김하락의 이천의진, 김두병의 의성의진과 함께 경주 연합의 진을 결성하였다.

다시 한 번 힘을 합친 의진연합군은 18일 경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감은리 전투의 영광을 재현한 경주연합군의 승리가 알려지자 경주성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들이 경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단 며칠 만에 100여 명이 넘는 의병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의병단이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을 상대로 승승장구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22일 대구부의 관군과 안강에 주둔 해 있던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합해 경주성을 공략해왔고, 다음날인 23일 경주성이 함락되고, 경주 연합 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다 시 뿔뿔이 흩어졌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관(공원) 전경. [사진=청송군청]
청송 항일의병기념관(공원) 전경. [사진=청송군청]

그렇게 흩어져 각 고을을 지키다가, 타 의진이 수세에 몰렸다는 소식을 접하면 해당 진영으로 이동해 연합군 작전을 이어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단이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에 청송의 진은 영덕 장사로 방향을 틀었다.

청송의진 합류를 기점으로 김하락의 이천의진은 영덕의진, 영해의진, 안동의진과 합세해 군사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7월 13·14일 양일간 영덕에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첫날 연합의진은 대승을 거두었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일본 관군을 보며 연합군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다음날 수세는 달라졌다. 군사와 물자를 재정비한 일본 관군 이 의진을 습격하였다. 이에 연합군 의병 수십 명이 사망하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의성의병장 김하락은 2발의 총상을 입어 생사의 기로에서 있었다. 같은 날 청송의병장 심성지를 보필하던 선봉장 홍병 태는 전사하고 말았다.

심성지는 전우이자, 아꼈던 부하 홍병태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도 없이 급히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튿날 심성지는 중상을 입었던 김하락이 의병단에 누가 될까 두려워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

김하락 전사 후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이천의진이 청송 화장동(花場洞)에 머물던 중 관군의 공격을 받고 또 한 번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장 화장으로 방향을 바꿔, 이천의진과 힘을 합쳐야 한다.”

심성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송의진은 화장으로 향했다. 오랜 전투로 인해 청송의진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수없이 많은 동료를 보낸 직후라 병사들의 사기 또한 저하되었다.

무엇보다도 김하락과 홍병태를 잃은 것이 의병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심성지는 이에 동 요하는 기색 없이, 깃발을 더욱 높이 들게 하였다.

“죽어간 그들을 대신해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고 반드시 조국을 되찾아 야 한다.”

노익장 심성지의 선창에 의병들은 다시 몸과 맘을 추스르고 이천의진 거처를 향해 속도를 냈다. 청송의진이 마평 화전등(花田嶝)에 당도 했을 때, 마을 일대에는 명칭에 걸맞게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러나 청송의진이 그 광경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관군의 기습을 받았다. 근거리에서 총알이 날 아들고 뿌연 화약이 의병을 에워쌌다.

청송의진이 이천의진과 연합할 것을 예상한 관군이 미리 이들이 지나가는 통로에 매복해 있었다. 꽃잎보다 더 붉은 핏방울이 사방에 번졌다.

순식간에 의병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전등’ 전투(花田嶝戰鬪)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의병은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관군을 무서운 기세로 의병을 궁지로 몰아갔다.

결국 청송의진은 청송에 진입하기도 전에 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였다. 다시 피로한 병사를 수습, 경주로 향하여 겨우 영천 인부에 도착하였으나 적병이 사방을 포위하였다.

청송의진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의병장 심성지는 청송의진이 영덕으로 방향을 틀 것을 명하였다. 겨우 관기에 이르렀으나,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적과 마주친 청송의진은 관군과 맹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미 화전리전투로 수많은 동료를 잃은 청송의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몇 몇 의병은 관군을 피해 도망갔다.

뿔뿔이 흩어지고 끝까지 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관군에 패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송의진의 85일간 대서사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한양서 전갈이 왔습니다.”

심성지가 부하의 손에 들린 칙서를 빼앗아 들었다. 해당 글을 본 심성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의병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의병장의 눈치를 살폈다. 심성지가 종이를 찢다시피 구기며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그를 따르던 의병들이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일어섰다.

“오늘부로 청송의진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네.”

심성지의 갑작스러운 해산 통보에 의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들린 종이만 응시하였다.

“아직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은 수지만, 연합하면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앞선 전투로 인해 200명에 육박하던 청송의진은 십 수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한 동료가 수십, 수백에 달하였다.

수세에 몰리자 몇몇 의병은 도망가, 돌아오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 아 돌아온 의병들은 군대 해산에 대해 고집을 부리며,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고 강변하였다. 이에 심성지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였다.

“… 임금의 의병 해산 칙유(勅諭)가 당도하였네.”

심성지의 말에 의병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몇은 고개를 떨구기도 하였다. 의병장 청송지가 의병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그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청송의진 창단부터 끝까지 의병장 심성지의 곁을 지키던 한 포병이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청송의진은 화전등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 네. 국가가 위기에 처한다면 의병은 조국을 위해 언제든 목숨을 바칠 것 이네. 그리고 역사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네.”

오랜 기간, 전투를 끝내고 고향에 당도한 청송의진은 ‘모든 군대를 해산’ 하라는 고종의 칙유문(勅諭文)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청송의진은 화전 등전투를 마지막으로 훗날 조국이 위험에 처하면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며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심성지는 한평생 가슴에 품었던 호, ‘소류’를 딴 ‘소류 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쓰기 시작하였다.

‘작은 덕은 흐르는 시 내 같아도 큰 덕은 가르치고 이끄는 교화를 돈독히 하니 천지가 위대해진다’는 심성지의 가르침은 큰 물줄기가 되어 조국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심성지는 의병진을 해산한 후 경사(經史)로 자오(自娛)하며 제자와 더 불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백록동규(白鹿洞規) 및 남전향약(藍田鄕約) 등을 강(講)하였다. 이후 1904년 음력 11월 13일 향년 일흔네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심성지가 이끈 청송의진이 보여주었던 민족적 위상과 기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전개되는 자발적 의병으로 이어졌다.

그 정신은 1910년 이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특히 의병들은 국권상실 이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운동에 목숨을 바쳤는데, 이 가운데 심성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청송의병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심성지의 아들 심능찬(沈能璨)도 부친과 함께 청송 의병활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심성지의 증손자 또한 6·25전쟁에 참가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심성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95년 정부로 건국훈장 애 국장을, 아들 심능찬은 2001년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증손자 또한 지난 1958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심성지 일가 3대의 공적비는 현재 청송 파천면 덕천리 소재 소류정에 자리해, 그 의기를 휘날리고 있다.

참고자료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유교넷 유 교역사관 (인물정보서비스), 청송문화원, 청송심씨대종회, 한국학자료센터,『우사 조도걸 전 집』, 조동걸, 역사공간, 2011.

·사진 제공_ 청송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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