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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2.22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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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사당에 모셔진 이상룡 영정. [사진 제공=안동시청]
임청각 사당에 모셔진 이상룡 영정. [사진 제공=안동시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911년 1월 7일 이른 아침, 이상룡(李相龍)은 가족들의 조용한 배웅을 받으며 고향 안동을 떠나고 있었다.

콧등을 때리는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에 이상룡의 마음은 더욱 착잡했다. 어느덧 오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 이, 이제 고향을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조국의 산하가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이상룡은 고향의 땅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삭풍이 몰아치는 헐벗은 산야가 지금의 나라꼴을 말해주는 것 같아 서 가슴이 쓰라렸다.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다

1년 전인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주권은 고스란히 일본에게 넘어갔다.

전국적 규모의 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 회(新民會)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1907년 4월, 안창호가 발의하고 한말의 애국지사들이 대거 참여해서 창립한 신민회는 영향력이 큰 계몽운동 단체였다.

국내에서 교육구국운동, 계몽강연운동, 출판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청년운동 등을 벌이는 한편,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서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계획을 세웠다. 무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910년 12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선발대로 신민회 간부 이동녕 (李東寧)과 이회영(李會榮) 등이 비밀리에 만주로 단체 이주를 시작했다.

이회영은 6형제와 그 가족, 노비 40여 명을 포함한 집안 전체가 만주로 이주했다. 전 재산(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을 처분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 금도 마련했다.

신민회 간부 주진수와 황만영으로부터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전해들은 이상룡은 크게 감명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도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평생 동안 살아온 고향을 떠나 낯 선 타국 땅으로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편히 살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러 간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상룡에게는 자신의 행복이나 편안함보다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이웃, 나아가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대대로 안동지역에서 살아온 명문가문의 장손이었다. 안동지 역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분이었다.

이상룡은 조상을 모실 제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산만 남기고 대부분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 금을 마련했다.

1911년 1월 5일, 새해를 맞이한 이상룡은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에서 조촐한 잔치를 열었다. 이제 만주로 떠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기약이 없는 집안사람들과 고향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1월 6일, 이상룡은 가까운 친지 몇 사람을 불러서 자신의 계획을 알리 고 자기 대신 가문을 잘 이끌어갈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조상들을 모실 경비와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쓸 재산을 전달했다. 아울러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풀어주고 양민으로 살아가도록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1월 7일 새벽, 만주를 향해 먼 길을 떠나는 이상룡은 가족을 일체 대동 하지 않고 단신으로 출발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일본경찰의 눈에 띌 것을 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룡이 재산을 처분하면서 만주로의 이주를 준비할 때 일본 경찰이 몇 차례 염탐하러 온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상룡은 혼자 서울로 볼일을 보러 가는 행색을 하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했던 것이다.

남은 가족들은 두 차례에 걸쳐 따로따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이상룡이 떠난 후 남은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아들 이준형은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추풍령으로 향하는 이상룡은 도중에 하회와 상주 등을 거치면서 친지와 지인을 만나 작별인사를 했다.

1월 9일, 상주에 도착한 이상룡에게 신민회 간부 몇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대거 만주로 이 주한다는 정보를 포착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굳은 신념을 품고 있는 이상룡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1월 11일, 추풍령에 도착한 이상룡은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상룡은 신민회 간부 양기탁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한 언론인 출신의 양기탁(梁起鐸)은 1910년 8월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를 직접 답사한 적이 있었다.

양기탁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대한 계획과 만주로 가는 방법을 이상룡에게 알려주었다. 양기탁으로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자 이상룡은 기대와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며칠 동안 서울에서 지내던 이상룡은 다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향했다. 신의주에 머물면서 뒤따라올 가족들을 기다리는 한편, 가지고 있던 자금을 중국 돈으로 바꾸고 만주에 대한 최근 정보도 수집했다.

1월 27일, 이상룡은 뒤늦게 도착한 가족들을 이끌고 압록강으로 향했다. 엄동설한의 혹독한 날씨와 일본 경찰의 엄혹한 검문 속에서 어린아이와 여성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넌 이상룡 일행은 수레를 타고 서간도(西間島)로 향했다.

도중에 마을이 없으면 수레 위에서 이불을 덮은 채 밤을 지새워야 했다. 중국 대륙의 겨울바람은 한반도 보다 훨씬 매서웠다. 꼭 껴안은 채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면서 열흘이나 고생한 끝에 회인현(懷仁縣) 항도천(恒道川)에 도착했다. 그곳에 먼저와 있던 처남 김대락이 이상룡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상룡의 최종 목적지는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의 삼원보(三源堡)였다. 신민회의 이회영 형제와 이동녕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이상룡은 하루라도 빨리 그들과 합류해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상룡은 아들 이준형을 삼원보로 보내서 이회영 등과 연락하는 한편 이상룡 일행이 기거할 집과 농사를 지을 땅을 알아보라고 했다.

삼원보에 먼저 도착한 이회영은 이상룡처럼 ‘조국의 완전한 광복을 이 루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전 재산을 처분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왔다.

그 모습을 본 중국인들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 전까지 만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들어서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행색은 초라하고 일행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회영 일가는 6형제 대가족에 많은 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짐 속에는 장차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사용할 군사장비도 있었다.

그러자 중국인들은 “일본과 합세해서 중국을 치러온 무리들이다.”라고 이회영 일가를 중국정부에 신고했다. 그 일로 이회영 일가는 곤욕을 치렀다.

조선인 들이 대거 몰려와서 정착하는 것을 경계한 중국인들의 견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숱한 난관을 겪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준형은 삼원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항도 천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상룡은 항도천에 머물면서 추운 겨울을 나는 한편,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해 4월, 막내 동생 이봉희 가족을 마지막으로 이상룡의 가족은 모두 무사히 항도천에 도착했다.

이제 계절도 이동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이상룡은 온 가족을 이끌고 애초 계획했던 최종 목적지인 삼원보를 향해 길을 떠났다. 항도천에서 삼원보까지는 200리에 달하는 먼 길이었다.도 중에 울창한 산림이 펼쳐져 있어서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갖은 고생 끝에 이상룡 일행은 마침내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했다. 먼저와 있던 이회 영 형제를 만나자 이상룡은 독립운동을 벌써 반은 이룬 것처럼 기뻤다.

그 무렵 삼원보에는 이상룡 일가와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해서 1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가족과 함께 이주해 있었다.

이들은 공동으로 삼원보 주변의 토지를 구입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1911년 4월,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이동녕을 임시 의장으로 선출하고 5개 조항을 의결했다.

첫째 자치기관 성격의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투적 도의에 입각하여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하여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서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육성할 것.

이와 같은 결의에 의해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경학사를 설립 하고 초대 사장에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경학사의 설립 목적은 노동을 하면서 학술을 연마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는 한편,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해서 인재를 키우기로 했다.

1912년 7월, 이상 기후로 큰 서리가 내려서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13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천재지변으로 운영이 어려워지자 경학사는 해산되었지만, 1914년 부민단(扶民團)이 경학사의 사업을 계승하면 서 명맥을 이어갔다.

년 3·1만세운동 직후 부민단은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었으며, 한족회는 군사지휘본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했다.

서로군정서 산하에 경학사의 부설기관이었던 신흥강습소의 맥을 잇는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간부들을 양성했다. 이 로써 경학사의 설립 취지는 뒤늦게 완성을 보았다.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에 태어나다

이상룡은 1858년(철종 9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아버지 이승 목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이다.

이상룡 집안이 안동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대조 이증(李增) 때부터였다. 이증은 조선의 개국공신 이원(李原)의 7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해현감과 영산현감을 역임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이증은 관 직을 떠나 안동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의리와 절개는 이상 룡 집안의 가풍이 되었다. 불의를 보면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상룡의 아버지 이승목는 1871년 서원철폐령 이 내리자 가장 먼저 상소를 올려서 항의를 한 인물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 안동 임청각.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 [사진 제공=안동시청]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 안동 임청각.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 [사진 제공=안동시청]

이상룡은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에서 태어났다.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년) 이상룡의 18대조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고성 이씨의 종택이었다.

이곳에서 이상룡을 비롯하여 동생 이상동, 이봉 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당숙 이승화 등 모두 아홉 명의 독립운동 유공자가 태어났다.

원래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50여 칸만 남아 있다. 한국 전통주택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조 있는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난 이상룡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 하고 대범했다.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예닐곱 살 때부터 한시를 짓는 등 영특했다.

또래 아이들과 놀 때도 아이들을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 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열세 살 무렵, 이상룡은 사서삼경을 모두 깨우쳤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김진린의 장녀 의성 김씨와 결혼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을 마무리하던 1875년, 아들 이준형이 태어났다. 이준형은 훗날 아버지 이상룡과 함께 만주 벌판에서 맹활약하는 독립운 동가로 성장했다.

1876년, 열여덟 살이 된 이상룡은 영남학계의 유학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 들어갔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흥락은 스물여덟 살에 학문의 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입학오도(入學五圖)』라는 책을 지은 뛰어난 학자였다.

이상룡이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간 해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고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이상룡은 당시 안동지역에서 학문의 뛰어나기로 소문난 권연하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상룡에게『중용』을 강론 해보라고 시킨 권연하는 뛰어난 강론 실력에 감탄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집안의 종손이 된 이상룡은 어린 동생들에 게는 어른 역할도 충실하게 했다.

한번은 동생 이용의가 커다란 종기가 나서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밤낮으로 정성껏 간호를 하던 이상룡은 “완전 히 낫게 하려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는 게 가장 좋다.”는 의원의 말에 즉 시 종기에 입을 대고 직접 고름을 빨아냈다. 이상룡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동생은 완쾌될 수 있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고종 19년), 이상룡이 스물네 살 되던 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은 좋은 대우를 받는데 구식군대의 군인 들은 13개월이나 봉급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다.

그러다 겨우 한 달 치를 받았는데 선혜청(宣惠廳) 창고지기의 농간으로 양이 부족하고 모래가 반이나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은 창고지기를 때려눕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의 집을 부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군인들은 운현궁으로 몰려가서 대원군에게 처지를 호소했다. 대 원군은 군인들을 달래는 척하면서 심복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했다.

그리하여 군인들의 폭동은 명성황후와 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맡겨서 반란을 수습하려 고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개입하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대원군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서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을 압박해서 주모자 처벌과 손해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결국 임오군란은 밖으로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을 확대시켰으며, 안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 시켜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초래했다.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 양반 출신 청년지식 인은 서구에서 들여온 서적으로 실학사상과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조선의 개혁에 눈을 떴다.

개항 이후 명성 황후가 주도하는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김옥균을 중심으로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이것이 개화파이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 세력과 개화파의 관계는 급속하게 나빠졌다. 청나라에 의지해서 정권을 유지하려는 명성황후 세력에게 개화파는 위협 적인 존재였다.

명성황후와 함께 평화적으로 개혁을 하려던 개화파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다. 이에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서 명성황후를 몰아내고 개혁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 설 피로연 때 거사를 하기로 결정한 개화파는 일본사관학교 유학생과 조선군인을 동원하기로 했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긴 뒤 일본군 200명과 조선군 50명이 지키도록 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0월 19일 오후 3시경, 명성황후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1,500명의 군사를 이끌 고 개화파를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이 군인을 철수시키자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나라 군대에게 사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 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다.

잦은 사건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이상룡의 마음은 답답해졌다. 나라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갑신변복령(甲申變服令)’이 내려졌다. ‘갑신변복령’은 우리 민족의 옷인 한복을 버리고 서양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이상룡은 향리의 유생들과 상의하여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초안을 작성했다.

1886년, 스물여덟 살의 이상룡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왔다.

그런데 시험관이 돈을 받고 합격증을 판매할 정도로 과거제도는 썩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이상룡은 회의감을 느끼고 과거 응시를 포기했다. 이후 고향 안동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1년여 동안 전국을 여행하면서 조선의 현실과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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