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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2.29 0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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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의 생가 내부와 부엌 아궁이. 태극기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진 제공=안동시청]
이상룡의 생가. [사진 제공=안동시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1894년(고종 31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아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한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등으로 불리는 이 민란은 탐욕스러운 관리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오래전부터 전라도는 곡창지대여서 나라의 재정은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라도 농민들은 늘 수탈의 대상이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해서 수세미(水稅米)를 되찾는 일이 벌어졌다.

조병갑을 체포하여 파면한 조선정부는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런데 이용태가 사후처리를 하면서 동학교도를 탄압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동학접주들은 1894년 4월 무장현(茂長縣)에 모여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 하는 ‘무장동학포고문’을 선포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이름으로 발표한 창의문에 10여 개의 읍이 호응하여 열흘 만에 1만여 명이 모였다.

이때부터 동학교도와 농민이 결합 했으며, 전봉준(全琫準)이 지도자로 봉기에 앞장섰다.

전봉준은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발표하면서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참여를 유도했다.

첫째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둘째 충효를 다해서 세상을 구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셋째 일본오랑캐를 내쫓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넷째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이었다.

이상룡의 생가 내부와 부엌 아궁이. 태극기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진 제공=안동시청]
이상룡의 생가 내부와 부엌 아궁이. 태극기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진 제공=안동시청]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세력이 커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개입했다.

11월 27일,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목천 세성산에서 첫 전투를 벌인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12월 11일에는 웅치(熊 峙) 방면에서 총공격을 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서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후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건 대대적인 전 투가 벌어졌다. 일주일 동안 수십 차례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잘 훈련된 일본군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참패했다.

1만여 명 중에서 500여 명만이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했다.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에 몸을 숨겼으나, 1894년 12월 30일 밤 관군의 습격을 받아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이듬해 4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1년여 동안 이어졌던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이때 참가했던 동학농민군은 뒷날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그 정신은 3·1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 위해서 개입했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다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조국 땅이 남의 나라의 전쟁터가 된 와중에 이상룡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이후 20여 년 동안 문중의 큰 어른이자 집안의 기둥으로 존재했던 할아버지였다.

이상룡은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에 들어가서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는 한편, 군사학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무감(武監)』이라는 책을 지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나라의 운명을 예감했던 이상룡은 이때부터 훗날을 준비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1895년 8월 20일 새벽 무장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왕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부임한 지 37일밖에 되지 않은 일본 공사 미우라였다.

미우라는 서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기습했다.

고종의 왕후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를 참혹하게 살해한 다음, 근처 숲속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불태워 버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세력다툼에서 러시아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조선의 연결고리였던 명성황후를 제거한 것이었다.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명성황후시해사건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896년 백범 김구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도,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도 바로 을미사변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까지도을 미사변은 일본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만행 중 하나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1895년 11월, 일본의 후원으로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 김홍집은 단발령을 선포했다. 당시 내세운 이유는 ‘위생적이고 활동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체와 머리털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상투를 자르는 것은 큰 불효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백성들은 이를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다.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이어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전국의 유생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으며 이는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안동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모인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12월 1일, 각 서원으로 통문이 돌려져서 의병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 유생 대표들 이 모인 자리에서 이상룡의 외삼촌 권세연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도곡마을에 들어가 있던 이상룡에게도 의병대가 꾸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의리가 중요한데 상중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초야에 묻힌 사람도 국난 극복을 위해 사명을 다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말하며 본가로 돌아온 이상룡은 곧장 권세연의 의병대에 합류했다.

도곡마을에서 군사학 관련 책을 쓰기도 했던 이상룡은 권세연의 의병대에 병법과 무기 사용법을 전수하는 한편, 고성 이씨 문중을 대표해서 자금도 기부했다.

안동의 의병대는 봉화, 예안, 영천, 순흥, 풍기, 호좌 등 7 개 읍의 의병대와 연합해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7천여 명의 의병대가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으나 전투장비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경상도에서 의병대가 분투하고 있을 무렵, 정부에서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 명령을 두고 의병대 내에서 찬반으로 의견이 나누어졌다.

이상룡은 “지금 많은 희생을 치르면 정작 중요한 일을 당했을 때 인재가 부족할 수도 있으니 일단 해산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상룡의 설득에 반대파들도 뜻을 꺾고 의병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안동 의병대는 군사에 관한 지식이 없었으며 훈련도 부족하고 군수품도 모자라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년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이상룡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

1897년 2월 20일, 의병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안동의 민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여 채의 집이 불길에 휩싸여서 안동의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다. 황폐해진 안동을 다시 일 으켜 세우기 위해서 이상룡은 향약을 도입했다.

세기 이후부터 조선사 회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향약은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켜서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는 규약이었다.

대한제국과 을사늑약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쳐서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는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천명한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독립협회파와 수구파가 연합하고 협조한 결과였다.

1898년 초, 정치체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독립협회파는 대한제국을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면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고 민권이 증대된다는 수구파의 주장에 설득당한 고종은 수구파를 지지하고 독립협회파를 배척했다. 자주독립세력을 꺾어야 대한제국을 침략하기에 편하다고 판단 한 외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정국의 주도권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인 된 수구파는 국제열강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정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주독립을 위한 힘을 기르는 일에는 소홀하고 제정러시아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한제국은 제정러시아에게 여러 가지 이권을 넘겨주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일본을 무마하기 위해 또 다른 이권을 넘겨줘야 했다.

나라가 격변을 격고 있던 1899년 10월, 이상룡의 스승 김흥락이 세상을 떠났다. 혈육의 죽음 못지않게 슬퍼한 이상룡은 3개월 동안 삼베옷을 입고 스승을 추모하는 한편, 스승이 남긴 글을 모아 문집을 발간하는데 앞장섰다.

1901년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7년여 동안 투병을 하다가 눈을 감은 것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여읜 이상룡은 실 질적으로 집안의 큰 어른이 되었다.

가족과 문중을 이끌어갈 막중한 책 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을 하던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강대국으로 여겨졌던 러시아는 뜻밖에도 일본에 패배 하고 말았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세력을 더 욱 확대해 나갔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이상룡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다시 나서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단 발령이 선포되었을 때 일어났던 전국의 의병 조직과 서울의 애국관리들 이 모여서 만든 ‘충의사(忠義社)’에 가입하는 한편, 고향 안동에서 가까운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할 준비를 했다.

1905년 2월에 예천의 이규홍, 거창의 차성충 등과 가야산 의병기지를 함께 하기로 뜻을 모았다.

임청각 내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군자정. 보물 제182호. [사진 제공=안동시청]
임청각 내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군자정. 보물 제182호. [사진 제공=안동시청]

1905년 7월 27일, 일본 수상 가쓰라는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와 밀약을 맺었다. 주요 내용은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이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8월 12일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11월 9일, 특명전권대신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일본 통감의 지배를 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이라고도 했지만 조약 체결과정의 강압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을사늑약으로 정리가 되었다.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이다) 체결을 강요했다.

11월 17일 고종황제가 불참한 가운데 8명의 대신이 참가한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토 히로부 미를 비롯한 일본 대신들과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끝 까지 조약을 반대했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찬성해서 조약은 통과되었다.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은 ‘을사오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임청각 내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군자정 내부 모습. 보물 제182호. [사진 제공=안동시청]
임청각 내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군자정 내부 모습. 보물 제182호. [사진 제공=안동시청]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였던 고종황제는 끝까지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승인하지도 않고 비준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력을 동원해서 조약을 강제로 집행했다.

외교권을 포함한 국권의 일부를 일본에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국가의 지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였다.

시종무관 민영환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고 자결했으며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는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을 작성한 다음 역시 자결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일본에 저항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있던 장지연은「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했다.

안동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룡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일이 가장 비극적인 모습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이상룡은 지금 이 시기에 어떻게 행 동해야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과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1905년 12월, 이상룡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가야산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면서 의병대를 조직하고 훈련할 계획을 논의했다.

이듬해 초, 집으로 돌아온 이상룡은 다른 동지들도 규합하는 한편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도 살펴보았다. 당시 경상도 동북부와 강원도 지역에서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대가 큰 활약을 하고 있었다.

신돌석의 활동소식을 접한 이상룡은 자신도 하루 빨리 의병대를 일으켜서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단발령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가야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정을 모 으는 한편, 1만 냥의 자금을 마련하여 무기도 구입했다.

어느 정도 진지를 구축하고 장정들의 훈련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가야 산 의병기지는 첩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진지는 초토화되고 무기는 빼앗기고 장정들은 죽거나 붙잡히거나 도망가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상룡은 크게 상심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1908년 11월에는 의병장 신돌석이 전 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의병대를 잠시 해산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휴식을 가지도록 한 신돌석은 자신의 부하였던 김상렬의 영덕 집에 은거했다. 그런데 현상금에 눈이 먼 김상렬의 계략에 휘말려 살해당한 것이었다.

가야산 의병기지 습격과 신돌석의 전사 사건을 겪은 이상룡은 다시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일본의 뛰어난 무기와 첩보력 앞에서 지금처럼 의병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승산이 없었다. 뭔가 다르고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했다.

대한제국의 멸망, 식민지시대의 시작

1907년 6월,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하기 위하여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자 일본은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을 장악했으며, 7월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위한 광무보안법을 공포했다.

8월 1일부터는 한반도를 식 민지로 만드는데 최대 장애물이었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작업에 착 수했다.

그 무렵, 안동에서는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류인식, 김동삼(金東三: 본명 김긍식), 김후병 등이 안동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신식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계몽활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안동의 유림들은 신식 교육기관의 등장에 심한 거부감을 가졌다. 이상룡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협동학교 설립에 적극 찬성하면서 자 금을 지원하는 한편, 반대하는 이들의 설득에 앞장섰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협동학교는 경상도 북부지역의 계몽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1908년 말, 이상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했다.

1907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된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한 이상룡은 애국강연회를 열고 회보를 발간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한 자강운동(自 强運動)을 펼쳤다.

외세를 배척하고 유교전통을 고수하려는 위정척사 사 상이 강한 안동에서 이상룡이 벌인 계몽운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이상룡은 안동경찰서에 잡혀갔다.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구축하고 의병대 조직을 주동한 혐의였다. 다른 관련자들을 알아내기 위해서 일본 경찰은 갖은 고문을 했지만 이상룡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룡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안동경찰서로 몰려와서 석방하라고 항의시위를 했다. 이상룡의 묵비권 행사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일본 경찰은 안동주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한 달 만에 석방하고 말았다.

1909년 12월,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는 쾌 거였다.

1910년 6월, 사법권과 경찰권을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 히 집어삼키기 위해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렸다.

8월 16 일, 조선통감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병합조약을 수락할 것을 독촉했다.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병합조약을 조인함으로써 한반 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8개조의 한일병합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넘긴다고 되어 있다.

조선 건국 519년 만에, 대한제국 성립 14년 만에, 한반도는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서 한반도 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다. 총복부의 보호 아래 일본의 자본가들은 한반도를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장악했다.

금융, 광업, 임업, 어업, 운수, 통신 등 산업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고 본격적인 수탈을 시작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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