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민감했던 아이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가야는 5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부흥의 조 짐을 보였다.

창녕, 밀양, 부산, 성주, 개령 등의 가야세력은 신라에 흡수되거나 동조하면서 가야의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고령, 합천, 진 주, 산청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역의 가야세력은 안정된 농업을 기반으로 해서 가야 부흥의 주축이 되었다.

가야 부흥에 앞장선 것은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이었다.

반파국은 철 생산이 풍부한 철광석을 소유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발전했다. 호남 동부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반파국은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국으로 자리 잡았다.

아직 제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던 왜는 반파국의 철을 무척 탐냈다.

왜는 반파국의 철을 수입해서 기술 발전을 이루고 반파국은 왜에 철을 수출해서 경제적 안정을 취했다.

철을 수출해서 세력을 키운 반파국은 예전의 가야지역을 대부분 복구한 다음 ‘대가야’로 이름을 고치고 가야의 12개 소국을 아우르는 연맹을 결성했다. 역 사가들은 이를 후기 가야라고 명명했다.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하남)을 함락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대가야는 독자적인 생존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479년,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금관가야의 왕이라는 설과 대가야의 왕이라는 설이 있음)가 중국 남제(南齊: 남조시대의 두 번째 왕조)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481년에는 백제, 신라와 함께 출동해서 미질부(지금의 경북 포항)까지 쳐들어온 고구려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다.

뛰어난 외교력 덕분에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까지 후기 가야는 최고 의 번성기를 누렸다. 거창과 함양을 거쳐 서쪽으로는 소백산맥 너머 섬진강 유역을 차지했으며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대립할 정도였다.

대가야가 한창 번성하고 있던 490년경, 우륵은 대가야의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일대로 추정되는 성열 현은 정치·문화적으로 제법 발달한 지역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륵은 소리에 무척 민감한 아이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뾰로통해 있다가도 어디선가 새소리나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금세 환한 얼굴이 되었다. 우륵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자라면서 점점 소리에 민감해진 우륵은 한번 들은 음악은 똑같이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어른들은 그런 우륵을 무척 기특하게 여겼다.

어른들이 일을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우륵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달래주었다. 어떤 때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풀피리를 연주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우륵은 점점 깊이 음악에 빠져들었다.

한편, 가야의 번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세기 초 남진정책을 추진하던 백제의 무령왕은 가야가 차지하고 있는 섬진강 하구를 통해 왜와 교역하려고 했다.

그러자 대가야는 크게 반발했다. 자신들의 중요한 교역 창구를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힘이 약했던 대가야는 백제에 호남 동부지역을 빼앗기고 대사(지금의 경남 하동)와 자타(지금의 경남 진주)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백제에 섬진강 하구를 빼앗긴 대가야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동쪽 의 낙동강 하구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어서 모든 해상무역 루트가 막힌 것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던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은 522년 신라에 청혼을 했다. 혼인관계를 통해서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대가야의 청혼을 받은 신라의 법흥왕은 가야로 진출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이뇌왕에게 왕녀를 보냈다. 마침내 결혼동맹이 성사된 것이었다.

이뇌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가야에 온 신라의 왕녀는 시종을 100여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이뇌왕은 시종의 일부만 대가야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는 가야연맹의 소국에 흩어져 살게 했다. 그러자 가야연맹 소국의 하 나였던 탁순국의 왕 아리사등이 크게 반발했다.

“왜 신라의 시종을 탁순국에 살게 한단 말인가. 혹시 대가야의 왕이 신라와 짜고 우리를 염탐하려는 것 아닌가.”

대가야와 신라를 의심한 아리사등은 신라의 시종들을 추방해버렸다. 아무 잘못도 없는 시종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에 신라 법흥왕은 크게 화를 냈다.

결혼동맹 파기를 선언하고 가야 땅에 있는 신라의 시종들에게 모두 철수하라고 명했다. 이에 깜짝 놀란 대가야는 부랴부랴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탁순국의 조치는 단순한 오해로 벌어진 일입니다. 대가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찌 이런 일로 동맹을 깨트린단 말입니까.”

대가야의 사신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진흥왕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로 이번 사건이 탁순국의 오해로 비롯된 일인지, 대가야는 이 사건에 관련이 없는 것인지, 진상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사절단을 파견하겠다.”

“그렇게 하옵소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절단을 파견하겠다는 진흥왕의 말에 오해를 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대가야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런데 가야에 도착한 신라의 사절단은 단순한 사절단이 아니라 무장한 군대였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가야의 몇몇 소국은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힘없는 나라로 존재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힘센 나라에 흡수되어 보호를 받는 게 났다는 판단이었다.

532년, 한때 가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처음 나라를 세운 수로왕부터 시작해서 구해왕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490년 동안 이어져 왔던 금관가야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신라 법흥왕은 구해왕과 그의 세 아들을 모두 진골 귀족으로 편입하는 파격적인 대접을 했다. 그것은 다른 가야소국을 노린 법흥왕의 뛰어난 전략이었다.

신라에 투항한 구해왕이 귀족 대접을 받는 것을 지켜본 다른 가야소국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야의 이름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외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뿐이었다. 그러나 가야를 포기하면 신라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얼마 뒤에는 탁순국이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하면서까지 가야연맹의 단결을 위해서 애를 써온 가실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야연맹은 서서히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가야의 몰락과 우륵의 망명

대가야박물관과 그 안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대가야박물관과 그 안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대가야박물관과 그 안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대가야박물관과 그 안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그 무렵 고구려·신라·백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영토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지금의 충북 증평 부근)을 빼앗자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지금의 충북 진천 부근)을 빼앗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을 하는 틈에 신라는 남부지역의 영토를 조금씩 확대해나갔다.

한강 유역의 영토를 확보하는 게 최종 목표였던 백제는 신라에게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연합군을 형성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해서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다. 마침내 백제는 6개 군을 회복하고 신라도 10개 군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물리치자 대가야는 친 백제계와 친 신라계로 나뉘었다.

신라에 항복했던 금관가야 구해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수가 되어 많은 공을 세우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가야 사람들은 신라와 친해져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라의 잦은 침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신라를 원수로 생각하면서 백제와 힘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가야연맹의 단결을 부르짖었던 가실왕이 세상을 떠나자 가야는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안으로는 친 백제계와 친 신라계의 대립이 심해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노리는 신라의 공세가 계속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가야를 떠나 백제나 신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가야 최고의 궁중악사 우륵도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외적의 침입을 맞이할지,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지 결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스승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가야의 운명은 다한 것 같습니다. 여기 가만히 계시다가 나라가 망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속히 이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우륵의 안전을 염려한 제자 이문(泥文)은 다른 나라로 피신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우륵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같은 일개 악사가 무엇이 위험하다고 해치겠느냐. 지금까지 살아온 고향을 떠나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이냐.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그게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가야를 상징하는 악기를 만드셨습니다. 가야의 단결을 촉구하는 음악도 만드셨습니다. 가야를 점령한 세력은 가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제일 먼저 스승님을….”

이문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네 말대로라면 여기 가만히 있으나 다른 나라로 가나 내 운명은 똑같을 것인데 그 또한 아무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곳을 알아놓았습니다. 그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스승님, 제발!”

계속되는 이문의 간곡한 설득에 우륵은 결국 가야를 떠나기로 했다. 551년, 가야의 국운이 다해갈 무렵 우륵은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의 국원(지금의 충북 청주)으로 이주했다.

남한강변 대문산 부근에 자리를 잡은 우륵은 날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어떤 명인이 남한강변 경치 좋은 곳에 나타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다는 소문은 금세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소문을 듣고 우륵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51년 3월,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신라 진흥왕은 사전 답사를 위해서 낭성(지금의 충북 청주)으로 행차를 했다.

낭성에 머물던 진흥왕은 가까운 국원에 음악의 명인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말을 듣고 그를 데려오라고 했다.

진흥왕 앞에 불려온 우륵은 담담했지만 제자 이문은 몹시 불안했다. 자신들이 가야의 유민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네가 음악의 명인이라고 소문이 난 사람이냐?”

“소인은 미천한 떠돌이 악사일 뿐입니다.”

진흥왕의 물음에 우륵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내 친히 확인하겠노라. 연주를 시작해 보거라.”

우륵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몰랐다.

연주가 끝나고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다시는 가야금을 연주하지 못하는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륵은 가야를 위해 만든 가야금으로 가야의 소국을 위해 만든 12곡의 음악을 차례로 연주했다.

우륵이 12곡의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진흥왕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륵의 연주가 끝나자 진흥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묘하구나. 내 태어나서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도다.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윽고 눈을 뜬 진흥왕은 우륵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륵이라고 하옵니다.”

“네가 연주한 저 악기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륵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터였다. 그렇지만 거짓으로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까지 생명을 부지하고 싶지는 않다는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인지도 몰랐다.

“가야금이라고 하는 악기입니다.”

“가야금이라고?”

진흥왕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이 악기가 가야와 상관이 있는 악기더냐?”

“소인이 가실왕의 명으로 만든 악기이옵니다.”

“그럼 너는 가야 사람이냐?”

“그러하옵니다.”

“흐음….”

진흥왕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륵과 이문에게는 그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전 생애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가야는 참으로 훌륭한 악기와 아름다운 음악을 가졌구나. 이 악기와 음악을 신라에도 널리 보급하도록 하여라.”

진흥왕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가야금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를 신라에 널리 알리라는 것이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가야는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인 데다 곧 망할 나라입니다. 망할 나라의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대신들이 적극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흥왕은 단호했다.

“적이라고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적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우리도 그것을 배워서 더 좋게 사용하면 되지 왜 그것을 버린단 말이냐. 그리고 나라가 망한 것과 음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흥왕의 명확한 결론에 대신들은 더 이상 반발을 하지 못했다. 가야가 곧 망할 거라는 것은 진흥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야는 신라에게 흡수될 것이었다.

이미 흡수된 소국도 몇 있었다.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는 과정을 별다른 거부감이나 마찰 없이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야의 뛰어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진흥왕은 판단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우륵은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에 자리를 잡고 공개적으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흥황은 계고(階古), 만덕(萬德), 법지(法知) 등 세 사람을 선발해서 우륵의 음악을 전수받도록 했다.

우륵은 세 사람의 재능을 시험해본 다음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제자는 우륵의 지도 아래 열심히 노력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륵은 세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12곡도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가야를 위해서 지은 12곡을 배운 세 제자는 이를 신라에 보급하기 위해서 5곡으로 줄였다. 이문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감히 스승님이 만드신 음악을 제멋대로 바꾸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야 출신이라고 깔보는 게 분명합니다.”

이문이 씩씩거리자 우륵은 껄껄 웃었다.

“원래 이 곡들은 가야를 위해서 만든 것이지 않느냐. 신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중국 악기 쟁을 참고로 해서 가야금을 만들었듯이 12곡의 음악도 신라에 맞게 5곡으로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야의 음악이 신라에 널리 알려진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스승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우륵은 신라의 세 제자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해주었다. 우륵과 세 제자의 노력으로 가야금은 신라의 대표적인 악기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가야금을 위한 음악도 모두 185곡이나 작곡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가야금의 전설 우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고령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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