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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7-13 17:15 (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⑯] 음악의 천재, 우륵(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⑯] 음악의 천재, 우륵(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5.30 0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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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554년,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품은 백제의 성왕은 왜와 연합하고 가야의 반 신라세력과 합세해서 신라를 공격했다.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던 왕자 창이 고립되자 성왕은 왕자를 구하기 위해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도중에 신라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해서 전사하고 말았다.

가야의 멸망

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백제는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백제의 보호를 기대하고 있던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하나둘 신라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562년 9월, 마지막까지 버티던 대가야가 신라의 공격으로 무너지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고 신라에 흡수되었다.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대가야문화누리 전경.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대가야문화누리 전경.

백제와 신라에 비해 뛰어난 철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가야는 왜 일찍 멸망하고 말았을까.

가야가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562년 신라의 이사부가 이끄는 2만 대군의 공격을 대가야가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야연맹 내부에서 싹 트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농업이나 해운 등의 입지조건이 비슷비슷했다. 따라서 각 소국의 힘이나 능력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전기 가야연맹 에서는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가 가장 번성했지만 다른 소국들을 통합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국가를 이루기에는 세력이 약했다.

그에 반해 백제와 신라는 일찍부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서 상대적으로 탄탄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경상도 내륙으로 통하는 수상교통이 발달했다.

왜와의 교역이 용이하고 한반도 서북부와 중부에까지 이르는 좋은 교통조건을 가진 남부는 외부세력이 늘 탐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고구려·백제·신라가 돌아가면서 가야를 공격해오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국력이 약했던 가야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주변 국가들의 각축과 견제로 한동안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던 가야는 5세기 중엽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소국연맹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에 비해 뒤떨어진 국력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어 외부세력에 대한 단일한 외교능력도 미흡하고 침입에 대한 대비나 방어능력도 뒤떨어졌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뛰어난 자원과 문화를 보유했던 가야가 역사에서 일찍 사라져버린 이유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백제와 신라 등 주변 국가에 비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에 대외문제를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야가 멸망한 이후 우륵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가야의 최후와 관련해서 우륵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가 2만 대군을 이끌고 대가야로 쳐들어오자 우륵은 대가야의 왕자인 월광태자를 숲속으로 피신시켰다.

얼마 뒤 우륵은 포로로 잡혀가고 나이 어린 월광태자는 혼자 남았다. 한참 뒤 가까스로 포로에서 풀려난 우륵은 월광태자가 숨어 있는 숲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월광태자의 몸은 푸른 달빛 아래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우륵은 쓸쓸히 스러져간 월광태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밤새도록 가야금을 연주했다. 우륵의 가야금 소리는 달빛을 타고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가야금 소리가 정정 울렸다고 해서 그 동네를 정정골, 혹은 금곡이라고 불렀다.

대가야가 망하기 직전 우륵이 신라로 피신해서 머물던 충주 일대에는 우륵과 관련된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남한 강변의 바위는 탄금대(彈琴臺)라고 부르고 있으며,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 부근에는 우륵이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금휴포가 있으며, 남한강 건너에는 우륵이 탄금대에서 연주하던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청금대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충주의 칠금리와 금능리는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제천의 의림지는 우륵이 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의림지 주변에는 우륵의 사당이 있었으며 그 사당 근처의 우륵정이라는 우물은 우륵이 물을 길어다 마셨던 곳이라고 한다.

신라는 가야 출신인 우륵을 받아들이고 가야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진흥왕은 우륵이 전수한 가야의 음악을 신라의 국가음악으로 삼았다.

신라는 가야국의 대표악기인 가야금을 고구려의 거문고와 쌍벽을 이루는 현악기로 널리 보급시켰다.

이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진흥왕의 판단력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우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야금이 오늘날까지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기로 남아 있는 것은 가실왕의 애국심과 진흥왕의 포용력, 그리고 우륵의 천재성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룩한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가야의 후손이다.

김유신은 가야 출신의 수많은 향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삼국통일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우륵이 남긴 가야금도 슬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가야를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가야는 안타깝게도 일찍 사라지고 말았지만, 가야 출신과 그 후손 들은 우리 역사 속에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참고자료

『가야금의 전설 우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고령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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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금열 2020-06-01 08:45:42
참고하세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6가야를 포괄합니다.
가야금 출처에 《증보문헌비고》 아라가야국에 “아라국(阿羅國)은 대개 가실왕의 나라로 가야금이 나는 곳입니다. <중략> ”가실왕이란 아라왕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증보문헌비고》 대가야국에 “금곡(琴谷)은 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가야국 가실왕 악사 우륵이 공인을 데리고 가야금을 익힌 곳이라 하고 혹은 가야금이 금관 가야국에서 나왔다고 한다.”하여 조선시대 가야금 출처는 지금의 함안, 김해, 고령으로 난립한 상황입니다.

악성 우륵은 가야에서 악사로 활동한 것을 고향으로 정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읍시대 백제 성열현과 성열성은 대가야 도읍지 고령에 소재할 수 없으며, 악성 우륵은 가야국에서 악사로 활동한 것이 고향으로 와전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