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9일 과천 경기소리전수관에서는 제 14회 과천 전국 경기소리 경창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주최한 단체가 (사)한국경기소리보존회다.

뉴스퀘스트는 25일 경창대회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는 (사)한국경기소리보존회 이사장 임정란 명창을 인터뷰했다. /편집자주

경기소리전수관 관장실에서. 임정란 명창.
경기소리전수관 관장실에서. 임정란 명창.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임정란 명창은 경기도무형문화재 제 31호 경기소리 보유자다.

우리나라의 소리를 지역별로 나눌 때 경기소리, 서도소리, 남도소리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도소리는 충청도 이남 주로 전라도의 소리이며, 판소리는 남도소리의 한 부분이다.

서도소리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소리이고 경기소리는 서울과 경기도 지방의 소리다.

조선조 500년 동안 서울과 경기가 국가의 중심이다 보니 경기소리는 조선 팔도의 여러 소리를 흡수하여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경기소리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12잡가와 휘모리잡가이며 또 창부타령이나 경복궁타령과 같은 여러 민요다.

1990년대 이후 국악 중에서도 판소리가 성행하면서 경기소리는 상당히 뒷전으로 밀린 듯하지만, 사실 경기소리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흥행이 잘 되는 소리였다.

그 경기소리의 중심에 과천 찬우물 마을이 있었다.

찬우물 마을은 일종의 광대촌으로 소리, 악기, 줄타기의 기예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 마을 출신 임종원이 1935년 창단한 대동가극단은 일제 강점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대동가극단에 임방울, 이화중선, 박귀희 등이 소속되어 전국과 일본, 만주 등을 순회 공연했다.

이 대동가극단의 본거지가 바로 과천 찬우물 마을이다. 대동가극단 단장 임종원은 임정란 명창의 집안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임정란 명창은 과천 찬우물 마을에서 1943년 태어났다.

- 대회 치르시느라 힘드셨죠?

-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인걸요. 지금까지 매년해서 14회입니다. 상금도 많이 올리려고 노력했고. 특히 국악 지망생들이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공정하게 심사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악경연대회에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해서 잡음이 생긴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감독 기관인 문체부에서 그러한 운영의 잘못을 파악하여 상을 아예 박탈한 경우도 있다. 1등에게 주어지던 영예의 대통령상을, 아예 없애버린 경우도 왕왕 있는 것이다.

임정란 명창은 경기소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있다. 사진은 자료실 내부.
임정란 명창은 경기소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있다. 사진은 자료실 내부.

- 그게 바로 국악인의 자업자득입니다. 부정한 짓을 하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어떻게 제자를 키우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젊은 국악인에게 당당할 수가 없어요. 국악인이라면, 국악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임정란 명창의 소신은 확고하다.

명창부, 일반부 등 다섯 부분 경기소리에서 많은 입상자를 배출하되, 지금 주어지는 최고상인 상금 500만 원의 국무총리상에서 더 발전시켜 대통령상 보유 대회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다.

판소리 대회에 주어지는 대통령상은 전국적으로 20여 개에 이른다. 하지만 서도소리를 포함한 경기소리 대회에 주는 대통령상은 하나도 없다.

경기국악제와 국악협회 민요대회에 있었던 대통령상은 박탈되었다. 하지만 형평성 차원에라도 경기소리 대회 중 운영이 공정하게 잘 되고, 운영 주체의 역량이 확실하며, 그 규모가 있는 대회는 대통령상 타이틀을 걸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국악의 각 부분이 골고루 균형 있게 발전한다. 현재는 판소리만 우대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문체부는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실태를 파악해서 형평성 있게 대우해야 한다.

임정란 명창은 어릴 때부터 국악을 배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20세 무렵부터 경기선소리산타령 보유자 이창배, 정득만 명창에게 사사했고, 이후 묵계월 명창의 제자가 되어 경기소리를 공부했다.

묵계월 명창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자, 임정란 명창은 전수장학생이 되고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묵계월 명창의 뒤를 이을 수제자, 수석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임정란 명창은 국가무형문화재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고향 과천으로 와서 경기도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 용기있는 결단이기도 했다.

경기도와 과천시에서는 찬우물 마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경기소리 12잡가와 민요의 맥을 잇고 있는 임정란에게 경기소리전수관을 지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경기소리전수관은 경기소리 전수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경기소리전수관에서는 우리의 소리, 특히 경기소리가 늘 울려 퍼진다. 경기소리가 경기도 과천에 터를 잡았으니 썩 잘된 일이다.

- 찬우물 마을에 가면 아직 제가 태어난 집이 헐리지 않고 남아 있어요.

임정란 명창은 경기소리전수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찬우물 마을로 갔다.

찬우물 마을 입구에 있는 줄타기 명인 김영철 기념비.
찬우물 마을 입구에 있는 줄타기 명인 김영철 기념비.

- 여기는 임종원 할아버지집... 여기는 김영철 할아버지집....

김영철은 찬우물 출신 줄타기의 명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 56호 보유자였다.

찬우물 마을 이름의 유래는 정조 임금 때부터 내려온다. 정조 임금이 화성 행차시 남태령을 넘어 수원으로 가다가 이 마을을 지날 때였다.

마침 임금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이 마을의 우물물을 떠서 대령했더니 임금은 물맛이 유난히 시원하고 달다 해서 이 우물에 당상(堂上)으로 품계로 올려 벼슬을 가자했다.

그때부터 이 우물을 ‘가자(加資)우물’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당시에도 이 마을에는 광대들이 살았던 재인촌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우물은 잘 정비되어 그러한 사연을 전하고 있다.

우물 바로 앞에는 줄타기 명인 김영철 기념비가 있고, 이 마을이 광대촌이라는 설명도 붙어있다.

찬우물마을 입구에 있는 가자우물.
찬우물마을 입구에 있는 가자우물.

광대촌 혹은 재인촌은 이제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버려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기가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과천 찬우물 마을의 경우 비교적 그 위치가 정확하게 특정되어 있고, 무엇보다 임정란 명창의 생가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과천시는 임정란 명창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지도를 첨부한 자세한 안내 팻말이라도 입구에 세우기를 바란다.

- 제가 이제 나이가 78세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욕심이 더 있겠습니까? 경기소리를 해서 이만큼 알려지고, 또 경기도나 과천시로부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제자도 길러냈지요. 제자 잘되고 경기소리가 발전하고, 또 경창대회 멋지게 운영하고 그러면 행복할 겁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할 겁니다.

임정란 명창 생가(빌라촌 사이에 1층 옛집으로 아직 남아 있다)
임정란 명창 생가(빌라촌 사이에 1층 옛집으로 아직 남아 있다)
생가 대문 앞에 선 임정란 명창.
생가 대문 앞에 선 임정란 명창.

임정란 명창은 나이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활기가 있고 기억력도 뛰어났다.

여러 가지를 조리있게 설명했다.

이런 명인이, 이런 명창이 있는 한, 과천 경기소리전수관의 미래는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정란 명창의 맑은 기운이 흘러 경기소리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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