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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3-09 17:19 (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7)] 겨레의 애인, 박록주(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7)] 겨레의 애인, 박록주(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1.01.16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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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 예술형태로 정착된 우리 고유의 극음악으로, 노래하는 광대가 북을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긴 사설(가사)을 소리와 아니리(말), 발림(몸짓)으로 엮어가는 종합예술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세기까지만 해도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서민음악이었지만 19세기 초부터는 지방관청의 행사와 양반대가의 집안행사에 소리꾼을 불러 즐기면서 양반사회에서도 유행하게 됐다.

대표적인 판소리로는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박타령)』, 『수궁가(별주부전, 토끼타령)』, 「적벽가」, 『숙영낭자전』,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전』, 『장끼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타령(왈자타령)』, 『가짜 신선타령』 등이 있다.

영남지역은 늘어지는 서편제보다는 힘찬 성음과 분명하게 분절되는 장단의 동편제를 선호했다.

전성기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전성기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명창으로 활동 중이던 1960년대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명창으로 활동 중이던 1960년대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때문에 경북 선산(구미) 출신 박록주도 대명창들로부터 동편제를 전수받아 100여 회가 넘는 방송출연과 60여 매가 넘는 음반을 취입했고, 수많은 공연에서 주연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녀의 특징은 억세고 모질게 맺고 끊는 창법과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으로 동편제의 멋을 잘 살려서 소리했고, 전라도 사투리 대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니리를 구사했다는 점이다.

명창 박록주의 예술혼

박록주는 192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판소리 『심청가』를 녹음했는데, 세상에 내놓자마자 폭발적 반향을 일으키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 영향으로 그녀는 전국적 명창의 반열에 올라 큰 인기를 누렸고, 전국 각지의 명사들이 그녀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소리판을 찾았다.

그래서 판소리 연구가 박황은 그녀에게 ‘겨레의 애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판소리계에서 『숙영낭자전』을 전문으로 부른 명창은 헌종 연간에서 고종 연간에 활동한 전해종뿐이었다.

그 후 스승 없이 스스로 『숙영낭자전』을 익히고 재편곡해 부른 정정렬이 있었고, 정정렬로부터 전수받은 박록주, 박초선, 그리고 박록주의 제자 박송이 등이 그 맥을 이었다.

『숙영낭자전』 줄거리는 이렇다. 경상도 안동 땅의 백상군은 늦게 아들 선군을 두었다.

어느 날 선군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한 낭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선군은 그 낭자를 잊지 못해 병이 났다. 우여곡절 끝에 옥연동에서 그 낭자를 만나 혼인했는데, 둘은 너무도 금슬이 좋았다.

과거를 보러가게 된 선군은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집을 떠난 첫 날 30리를 갔다가 밤에 몰래 돌아오고, 다음날은 50리를 갔다가 몰래 돌아와 아내와 동침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백상군은 며느리 방에서 남자소리가 들리는 것을 수상히 여기고 시비 매월을 시켜 그놈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다.

평소 선군의 아내를 시기하던 매월은 그 남자가 선군이라고 말하지 않고 엉뚱한 남자라고 거짓말했다.

정절을 의심받은 선군의 아내는 자결을 했는데, 그 배에 꽂힌 칼이 뽑히지 않고 시체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과거를 보러 간 선군은 장원급제했는데, 아내가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선군은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 부인의 원한을 풀어주고 새 아내를 맞아 잘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박록주는 1970년 박초선과 함께 『숙영낭자전』을 녹음해 발매했다. 그후 박록주의 제자이면서 『홍보가』 기능보유자인 박송이가 음반을 발매했을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정정렬의 「모자 이별하는 대목」과 「약 구하러 가는 대목」이 유성기 음반에서 복각돼 일부 유실된 상태로 남아 있고, 박록주 녹음 테이프와 창본, 박송희 창본과 실황음반만 전하고 있어서 『숙영낭자전』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박록주는 『홍보가』를 인정받아 판소리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흥보가(일명 박타령)』는 다섯 마당의 하나이며, 우리가 아는 고전소설 『흥부전』과 그 내용이 같다. 사설은 해학적이면서 우화적이고, 한 마당을 완창하는 데 대략 세 시간가량 걸린다.

박통 속에서 나온 놀이패들의 재담이 많이 들어 있어 재담소리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홍보가』는 송혹록에서 시작돼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김정문, 박록주, 강도근, 박봉래, 박봉술로 이어지는 동편제 계보가 있고, 정창업에게서 시작돼 김창환, 김봉학, 오수암, 박지홍, 정광수, 박초월, 박동진으로 이어지는 서편제 계보가 있다.

그중 동편제 『홍보가』는 박록주, 박봉술, 강도근, 오정숙 등의 네 가지 마디로 전승되고 있다.

박록주의 『홍보가』 판소리는 제비표조선레코드, 지구레코드사 등에서 낸 SP판과 LP판이 여럿 남아 있다. 그녀는 『홍보가』 중에서도 초앞부터 「놀보가 제비 후리는 대목까지」를 즐겨 불렀다.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둥 높/ 이 떠어/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지척이요 동해 창망/ 허구나 축융봉을 올라가니/ 주작이 넘논다 상익토/ 하익토 오작교 바라보니/ 오초 동남 가는 배는/ 북을 두웅둥 울리며/ 어기야 어야 저어가니/ 원포귀범이이 아니냐/ 수벽사명양안태(水碧沙明兩岸苔) 불승청원(不勝淸怨)/ 각비래(却飛來)라 날어오는 저 기러기/ 갈대를 입에 물고/ 일점 이점을 떨어지니/ 평사낙안(平沙落雁)이이 아니냐/ 백구(白鷗) 백로 짝을 지어 창파 상에/ 왕래허니 석양천이 거의노라 (…)

박록주의 「제바노정기」 사설 중 일부이다. 박록주는 송만갑, 김창환, 김정문으로부터 『홍보가』를 전수받았는데, 스승들에 비해 좀 더 거칠고 웅장하게 노래하여 남성들보다 더 남성적인 동편제를 구현했다.

또 가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두 통성으로만 소리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의 채수정은 석사과정 논문 「박록주 흥보가의 음악적 특징-제비노정기와 박타령을 중심으로」를 통해, 「제비노정기」의 경우 박록주는 김창환에게서 배웠지만 이를 변환하여 자신만의 독창적 창법을 구사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흥보가 들어오며 여보 마누라, 이리 울지만 말고 저 지붕 위의 박을 따다가 박 속을 끓여 먹고 바가지는 부잣집에 팔아다가 어린 자식들을 살리면 될 것이 아닌가. 흥보가 박 세 통을 따다 놓고 먼저 한 통을 타는듸(아니리)/

시르렁 실건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헤여루 당그여라 톱질이야…. (진양조 박타령)

박록주의 「박타령」은 박봉술과 강도근의 ‘홍보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박을 톡톡 튕겨보니…’와 오정숙의 ‘흥보가 후원으로 돌아가 박을 퉁겨본 즉 팔구월 찬이슬에 박이 꽉꽉 여물었것다’ 부분을 생략하여 아니리가 보다 간결하고 투박하며 직설적이지만 내용이 더 깊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 진양조 박타령에서도 박봉술은 ‘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에여루 당그주소 시르르르르르르…’로 시작하고, 강도근은 ‘시르르르르르르 시르르르르르 톱질이로구나, 에이여루 톱질이로구나 시르르르 실근실근으 톱질이야…’로 ‘시르르르르르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지만 박록주는 ‘시르렁 실건’으로 압축하여 간결화시켰다.

박봉술과 강도근, 오정숙은 진양조로 박타령을 부른 후 박이 쪼개지는 끝부분에서는 휘모리로 바꾸어 마무리하지만 박록주는 휘모리 없이 진양조로만 부른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박록주의 『홍보가』는 매우 거칠고 투박하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을 생략하는 대신 시원시원하고 빠른 전개로 관객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재미를 더하는 장점이 있다.

후기의 공연활동

박록주는 1930년대 후반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활동에서 대부분 주연을 맡아 공연했다.

1937년 서른셋에 동양극장에서 창극 『심청전』을 공연할 때 심청 역을 맡았고, 이듬해 창극 『숙영낭자전』를 공연할 때도 숙영낭자 역을 맡았으며, 창극 『열녀화』 공연에서도 도창 역을 맡았다.

쟁쟁한 명창들을 젖히고 그녀가 주연을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원로 명창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녀가 판소리의 전성시대를 열고 전국적 인기몰이를 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녀만 출연하면 흥행이 보장됐다는 얘기다.

그녀는 서울의 대표적인 한남권번과 한성권번, 대정권번, 조선권번 중 한남권본 소속의 예기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기 있는 선배 예기들을 젖히고 주연을 도맡았고, 왕성하게 방송활동과 음반 취입을 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조선음악협회 주최 제2회 공연인 조선음악대회에서는 이동백, 지용구, 심상건 등의 원로악사들, 그리고 강소향, 김운선, 이화중선, 김해선 등의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출연했고, 우미관에서 열린 신춘남녀명창대회에서도 이화중선, 김추월, 강소춘, 이소향 등의 기라성 같은 명창들과 함께 공연했다.

그래서 스물여섯 즈음에는 한남권번의 대표예기로 꼽혔다.

1930년 박록주는 한성권번 소속으로 있으며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김창룡, 한성준 등의 원로 명창들과 함께 조선음률협회를 창립하는데, 20대 중반에 이미 판소리계에서 위상을 확고히 정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음률협회 창립기념 공연에 출연해 단가 「죽장망혜」, 「망고강산」, 「소상팔경」을 불렀고, 이듬해 3월엔 단성사에서 열린 조선음률협회 제2회 공연에서 단가 「죽장망혜」와 「동풍가」, 그리고 『춘향가』를 불렀다.

또 9월에도 조선극장에서 열린 팔도명창대회에 같은 한성권번 소속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출연했다.

구미시 주최 ‘명창 박록주’ 탄생 111주년 국악대공연, 2016년 11월 13일 구미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사진=구미시청]
구미시 주최 ‘명창 박록주’ 탄생 111주년 국악대공연, 2016년 11월 13일 구미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사진=구미시청]

1934년은 박록주의 나이가 서른이 되는 해였다. 그해 그녀는 김종익과 결혼하고 조선음률협회 후신인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활동을 펼쳐나간다.

창극 『춘향전』과 『흥보전』, 『심청전』, 『토끼타령(수궁가)』 등의 공연을 계속하면서 전통 판소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극화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고전소설 『옹고집』의 골자를 찾아내 김승용 각색으로 가극화하고, 또 농촌과 어촌 이야기를 엮은 박생남의 소설 『농촌야화』를 가극화하여 공연한 것이 그것이었다.

박록주는 「옹고집」에서 옹고집의 아내 역할을 맡았고, 「농촌야화」에서는 고기잡이의 딸 애경 역을 맡았다. 이는 창극계의 획기적인 실험창극이었다.

그 외에도 「백제의 낙화암」, 「장화홍련전」 등의 새로운 창극공연에 출연하며 실험창극을 이끌었다.

박록주는 1938년 송만갑, 임방울, 이동백, 김연수, 김창룡 등의 명창들과 함께 전조선향토연예대회에 출연해 『심청가』 중의 한 대목을 불렀고, 박초월, 오비취, 임소향 등과 함께 여류명창대회에 출연해 단가 「운담풍경」 등을 불렀다.

그 외 인천에서 열린 경인연합명창음악연주회, 황해도 개성좌에서 열린 삼대여류명창대회, 평안도 사리원에서 열린 여류명창대회, 해주극장에서 열린 조선음악의 밤, 수원에서 열린 명창대회, 대구공회당(지금의 대구시민회관)에서 열린 조선가극대회, 원산의 영흥극장에서 열린 명창대회 등등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 후로도 은퇴 전까지 많은 명창대회와 공연에 출연하며 인기몰이를 계속했다.

그러나 박록주의 말년은 쓸쓸했다. 번 돈을 다 쓰고 셋방을 전전했다고 한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에 위치한 박록주 기념비. [사진=구미시청]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에 위치한 박록주 기념비. [사진=구미시청]

1978년 일흔네 살의 박록주는 고향 선산으로 내려갔다. 고별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소리를 하면 폐가 부어서 노래할 수 없는 몸이었으면서도 고향 사람, 고향 땅과 작별할 시간을 갖기 위해 무리해서 내려갔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박록주는 관객 앞에서 「백발가」를 불렀다. 노명창의 숨찬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지자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1978년 5월 26일 박록주는 한 많고 설움 많은 생을 마감하고 면목동 단칸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혈육이 없어서 양아들 조상현이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참고문헌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박록주 저, 뿌리 깊은 나무, 1976. 6.),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활동」(김석배, 판소리학회지, 2000. 12.), 「정정렬과 박록주의 숙영낭자전 비교분석 연구」(민혜성, 추계예대 교육대학원 국악교육정책전공), 「박록주 홍보가의 음악적 특징」(채수정,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동편제 흥보가 박타령의 바디별 음악적 구조와 특성」(김혜정, 경인교육대학교음악교육과 교수), 『봄봄이 사랑한 명창, 박록주』(하윤아, KBS전주방송 작가, 2011. 6.)

·사진 제공=구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