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원효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영취산에 숨어 살고 있던 낭지(朗智)를 찾아가 『법화경』을 공부했다.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했다는 이야기는 원효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나는 여러분을 공경하고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부처가 될 분들이기 때문이지요.”

중생은 계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부처가 될 잠재력을 지닌, 그가 공경해야 할 존재였다.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지은 봉화 청량사의 유리보전. [사진=경산시청]

스승과 도반

원효는 울산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도 낭지의 가르침을 받고『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썼다.

원효가 포항 운제산에 머물며 경전을 풀이할 때는 의문이 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가까운 항사사(恒沙寺)에 있던 혜공을 찾아가 물었다.

평민 출신인 혜공은 작은 암자에 머무르며 삼태기를 지고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은 삼태기를 지고 다니는 화상이란 뜻으로 부궤 화상이라 불렀다.

혜공과 원효는 허물없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루는 두 사람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똥을 누고 있는데, 물고기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보였다. 불가에서는 구도를 물고기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비유했다.

혜공이 원효를 놀렸다.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

이즈음 원효는 평생의 도반, 의상을 만났다. 의상은 원효보다 여덟 살 아래로 진골 명문가 출신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의기투합해 백제 땅 전주 고대산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열반종의 창시자인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이와 있었다.

보덕은 원래 평양성에 살았는데 보장왕이 도교를 숭상해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자 백제로 건너와 완산주에 경복사를 지었다. 

원효와 의상이 신라와 대치하고 있 던 백제로 들어간 것은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의 최고 권위자인 보덕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국경에서는 삼국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지만, 경복사에서는 고구려 고승과 백제 학승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온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치열하게 공부하며 논쟁하고 있었다.

당시 삼국의 말이 서로 달랐지만, 삼국의 스승과 제자들이 불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는 장벽이 되지 않았다.

고구려 스승과 신라 학승을 받아들인 백제 땅 경복사에서는 전쟁과 갈등을 극복할 사상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유마경』은 원효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생에게 병이 있는 한 나에게도 병이 있고, 그들이 나으면 나도 낫는다. 보살의 병은 커다란 자비에서 일어난다. 연꽃이 진흙 연못 속에서 피어나듯이 불도는 번뇌의 진흙 구덩이 속에서 생겨난다.”

또,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은 오직 하나이며, 모든 사람이 고루 성불할 수 있다는 『열반경』의 사상은 원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원효는 보덕에게 배운 뒤 열반경을 요약한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와 유마경을 요약한 『유마경종요(維摩經宗要)』 1권과 유마경을 풀이한 『유마 경소(維摩經疏)』 3권을 남겼다.

원효는 처음에는 스승을 찾아 배웠으나 나중에는 스승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불법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깨달음

원효는 서른네 살이 되던 650년(선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당시 신라 불교계는 중국 유학파인 자장과 안홍이 주축을 이루면서 중국에서 선진학문을 배우고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판도가 짜이고 있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 한강을 차지하면서,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한강 뱃길을 통해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라가 중국으로 유학생을 처음 파견한 이래 300년 가까이 당나라에 간 유학생 수가 2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원효가 활동하던 당시의 불교계도 중국유학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는 이유는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 신라 불교계의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현장(玄奘: 602∼664)이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현장은 『서유기(西遊記)』의 삼장법사로 널리 알려진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장안사 주지 자리를 마다하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고산준령과 사막을 지나 인도로 건너간 인물이었다.

17년 동안 인도 유적지를 돌며 계현법사 아래서 공부한 현장은 브라만어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당나라로 금의환향해 75부 1000여권의 책을 번역하고 여행견문기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를 썼다.

원효에게 당나라 유학은 현장의 선진학문을 배우기 위한 구도의 길이었다.

7세기 당시에는 당나라로 가는 길이 요동반도를 지나 장안으로 가는 육로와, 배를 타고 산둥반도 등주를 경유해 장안으로 가는 바닷길이 있었다.

두 사람은 요동지방을 경유해 육로로 가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당시 요동지방은 신라의 적국인 고구려 영토로, 고구려와 당나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백제 땅으로 보덕을 만나러 갔던 것처럼, 이 위험천만한 곳을 향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붙잡혔다가 중국에는 발도 붙여보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는 다시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이번에는 바닷길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교통 거점인 당성(黨城: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나루터에서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큰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토굴을 찾아 들게 되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 잠이 깬 원효는 손을 더듬어 그릇에 담긴 물을 마셨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놀랍게도 그곳은 해골이 뒹굴고 있는 오래된 석실 무덤이었다.

전날 달게 마신 감로수는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구역질을 했다.

날이 밝았으나 비는 그치지 않고 밖은 물난리가 나 결국 하룻밤을 더 무덤에서 묵게 되었다.

잠을 자려 했지만 밤이 깊어도 원효는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귀신 눈동자가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귀신과 씨름하는 동안 동이 텄다. 날이 밝자 귀신들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지난밤엔 토굴인 줄 알고 잘 잤는데, 오늘밤은 무덤인 줄 알고 나니 귀 신 굴이 따로 없구나.’

비로소 원효는 깨달았다.

‘마음이 생기니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니 토굴과 무덤이 둘 이 아니구나.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달렸구나! 그러니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나라에는 어떻게 있을 것이고, 당나라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왜 없겠는가.’

이제 원효에게는 당나라로 갈 이유가 사라졌다.

이날 두 도반은 헤어져 서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원효는 서라벌로 돌아왔고, 의상은 외로운 그림자를 밟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서라벌로 돌아오다

원효가 왕경의 분황사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찾는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에서 수집해온 수많은 경전들이 분황사에 모여 있었다.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이 귀국할 때 가져온 400 상자 분량의 경전과 논소가 분황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원효는 분황사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저술에 몰두했다. 원효는 『화엄경소(華嚴經疏)』와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이곳에서 집필했다.

원효의 책은 일본과 중국에 전해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삼장법사 현장이 귀국할 때 수레에 싣고 온 인도 경전은 번역돼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현장이 소개한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불교이론과 달랐으므로, 다른 두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놓고 당시 많은 승려들이 고민했다.

이 의문에 답을 준 사람이 원효였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책을 쓸 때 목이 마르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마시곤했다. 우물로 걸어가면서도 원효는 생각에 잠겼다.

‘부처님 세상에서는 대립과 모순이 없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대립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긷던 원효는 석정(石井) 틀의 바깥 부분은 팔각 모양이지만 우물과 연결된 내부는 원형인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우물 모양이 바깥에서 보면 각이 져 있지만 내면은 모두 하나의 원인 것처럼, 다른 종파나 계파 간의 다름과 대립도 부처의 일심사상으로 보면 모두 융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무간지옥, 7세기 신라를 살고 있던 원효에게 대립과 분열을 끝내고 화합을 이루는 것은 절박한 문제였다.

이런 고민과 사색에서 나온 결정체가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고, 이 사상을 훗날 정리한 책이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신라를 넘어 동아시아 지성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만인의 적

원효의 저서가 동아시아에 전해지며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원효는 그에게 명망을 안겨준 붓을 던져버렸다.

원효는 서라벌에 와서 신라 불교계의 허위와 위선, 교만을 신물이 나도록 보았다.

호국불교라는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채, 중생을 등지고 왕실을 위한 법회를 열고 대사원에서 가부좌를 틀고 깨달음을 구하는 불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원효는 고뇌했다.

당시 신라 불교계 주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인물이 자장이었다.

그는 진골귀족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출가했다.

깊은 산 속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자장은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불교의 힘으로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선덕여왕을 도와 자장은 신라가 보살이 머물렀던 불국토이며,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의 종족이라는「진종설(眞種說)」을 만들어냈다.

그 증거물로 신라삼보(新羅三寶)까지 제시했으며 선덕여왕을 이상적 군주로 칭송했다.

대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채, 왕궁 주위에 거대 사찰을 지었다.

신정치 세력으로 떠오른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견제를 받아 축출되기까지, 자장은 대국통에 올라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원효는 민중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굶주림과 고된 노역으로 고통을 받는데도 귀족들은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날을 지새우는 현실을 보았다. 

신라 애장왕 때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상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하부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사진=경산시청]
신라 애장왕 때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상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하부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사진=경산시청]

그는 오랜 고뇌 끝에 깨달음에 이르자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저잣거리로 들어가 시정잡배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승려가 세 속사람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당시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생에게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민초의 눈높이에 맞춘 이 교화방법이 부처님 계율에는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원효는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원효에게 이론과 실천은 균형을 잡는 새의 양 날개이고, 수레를 움직이는 양쪽 바퀴였다.

원효의 행적은 민중의 큰 지지를 받았지만, 신라 불교계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송나라 찬녕(贊寧)은 고승의 전기를 수록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원효를 이렇게 평가했다. 

“진리의 성을 용감하게 공격하고 문진(文陣)에서 종횡무진 당당히 분투해서 나아갈 뿐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삼학(三學)에 두루 통달해 능 히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인물이었다. 도리에 정통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만인의 적이었다.”

그는 비록 주류사회에서는 만인의 적이었지만, 그들로부터 내침을 당하면서 역설적으로 기존 불교계에 반발하고 있던 민심을 얻었다.

대중화를 통해 불교 기반을 넓혀나갔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훗날 신라 불교가 민중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찬란한 황금기를 맞는데 큰 거름이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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