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요석공주는 원효를 만나 설총을 낳기 전, 내물왕의 후손인 화랑 김흠운(金欽運)과 결혼했다.

김흠운은 655년(무열왕 2년) 백제의 심장부에 들어갈 수 있는 전초기지였던 양산(陽山: 오늘날의 충북 영동) 조천성을 공격했다.

명예와 기개를 소중히 여겼던 김흠운은 백제군의 기습을 받고 위기에 몰리자 다음을 기약하자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신라 사람들은 김흠운과 낭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양산 가(陽山歌)」를 지어 불러 그들의 넋을 위로 했다.

김흠운은 죽어 신라 사람에게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과부가 된 요석 공주는 홀로 딸을 키우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시기는 무열왕이 왕에 오른 기간으로, 김흠운이 사망한 뒤인 서른여덟 살에서 마흔세 살 사이이다.

원효는 어느 날 저잣거리를 돌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빌려준다면(誰許沒柯斧)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오리다(我斫支天柱)

파계

이 노래는 뜻을 알기 어려웠다.

책깨나 읽었다는 젊은 학승이나 유학자는 『시경』에 나오는 「깨진 도끼(破斧)」의 ‘도끼 자루 부서지고 날도 이 빠졌는데/ 주공께서 동정하사 세상을 구하시고/ 우리 백성 아끼셔서 큰 사랑 이루시네(旣破我斧 又缺我錡 周公東征 四國是吪)’를 패러디한 노래라고 했다.

여론을 움직이는 식자층에서는 자루가 부서지고 이가 빠진 『시경』의 도끼는 백성을 구하려 불철주야 애쓰느라 몸이 성한 데가 없었던 중국 성현 주공(周公)을 비유했다면, 원효의 노래 속에 나오는 ‘자루 없는 도끼’는 민심을 잃은 신라 위정자를 풍자한다고 했다.

이 노래는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고 신라 위정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김춘추 무열왕은 이 노래가 풍기는 뉘앙스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왕은 정치적 동지인 김유신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노련한 백전노장 김유신이 말했다.

“왕께서 큰일을 하시려는데 천군만마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당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했던 이 정치가는 김유신의 말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열왕은 원효의 노래를 이렇게 해석해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대사가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익이 막대할 것이야.”

무열왕은 궁의 관리를 불러 원효에게 보냈다. 남산에 있던 원효는 왕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왕의 의중을 읽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로구나.’

원효는 허공으로 한 걸음 발을 떼었다.

남산에서 내려와 나무다리, 문천교를 건너던 원효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열왕의 관리와 맞닥뜨렸다.

이때 원효는 물에 빠져 옷을 버리게 되었다. 관리는 젖은 옷을 갈아입자며 원효를 공주가 기거하는 요석궁에 데려갔다.

『삼국유사』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원효는 궁궐 관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고 가게 했다.

신라 신분제에서는 진골인 요석공주와 6두품인 원효는 혼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열왕 김춘추는 왜 관리를 보내 요석공주와 원효를 이어주었을까?

당시 신라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불가사의를 풀기 어렵다.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가 신라 대야성(大耶城: 오늘날의 경남 합천)에 쳐들어왔다.

대야성 도독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는데,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백제에 항복했다.

신라가 대야성 싸움에 패배하면서 김춘추는 반대파들의 정치공세에 직면했다. 이때 수세에 몰린 김춘추를 구해준 사람이 김유신이었다. 

백제와 국경지대가 된 경산에 압량주가 설치됐는데 이곳의 도독으로 부임한 김유신은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대야성을 탈환했다.

김춘추도 외교력을 발휘해 당나라에가 원 병을 약속받는데 성공하면서 정치적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신라가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신라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압량주 도독으로 있던 김유신은 이 지역 출신으로 대중교화를 펼치며 폭넓게 민심을 얻고 있던 원효에게 주목했다.

삼국통일을 이루려면 민심을 얻는 것이 천군만마를 얻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 백전노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덕여왕을 등에 업고 신라 불교계를 장악한 자장 세력을 견제해 축출하기도 했던 김유신은 원효를 김춘추에게 천거하며 그들의 진영으로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원효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장과는 달리 권력에 초탈한 인물이었다.

압량국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한 원효의 집안처럼, 김유신 가계도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의 후예로 두 집안 모두 신라사회의 비주류 출신이었다. 그러나 김유신 집안은 전장에 나가 적극적으로 전공을 세우며 주류세력과 유대를 다져왔다. 

그러나 전공만으로는 신라 주류사회에 진입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유신 가계는 힘겹게 신분제도의 벽을 두드리며 혼사를 통해 장막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신라 골품제는 완고했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과 혼인하려 했을 때도 그녀의 집에서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반대해 결혼에 이르기까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유신이 김춘추의 아이를 임신한 누이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는 극단적 방법을 쓰고서야 가까스로 혼례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사실은, 혼맥을 통해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던 김유신 가계의 노력이 얼마나 지난했고 신라 골품제의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왕실 김씨와 구분해 ‘신김씨’로 불렸던 김유신 가문은 이런 노력을 통해 김유신에 이르러서 마침내 신라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김유신이 정치력을 발휘해 김춘추는 진골귀족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안으로는 귀족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고, 밖으로는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 놓여 있었다.

무열왕 김춘추로서는 백성을 통합할 정신 적 지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원효를 영입하는 것은 바로 백만 대군에 비유되는 민심을 얻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생각은 일치했다.

연꽃은 진흙탕 오물에서 피어나 멀리 맑은 향기를 퍼뜨린다.

원효는 정치세력이 그를 두고 얻으려는 정치적 잇속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흙탕물을 정화해 연꽃을 피울 수 있는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흙탕물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꽃피어났고 훗날 대학자가 될 설총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으면서 비공식적이지만 무열왕의 사위가 되었다.

문무왕과는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고 김유신과는 동서 간이 되면서 원효는 신라왕실과 얽히게 되었다.

668년(문무왕 8년) 원효가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군량미 수송원정대에 종군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이 원정대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온 당나라 군대에 군량미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무사히 군량미를 전해주고 난 김유신은 소정방의 암호문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군에서는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이 군사 암호를 푼 사람은 다름 아닌 원효였다.

암호문은 송아지(犢)와 난 새(鸞)를 그린 그림이었다. 원효는 송아지와 난새를 그렸다는 ‘화독화란(畵犢畵鸞)’에서 따온 것임을 알아챘다.

‘화독화란’에서 각 음절의 반음절을 읽어 합치면, 즉 화의 ‘호’와 독의 ‘옥’, 화의 ‘호’와 란의 ‘안’을 합치니 ‘혹환’이 라는 단어가 조합됐다.

혹환은 빨리 돌아가라는 ‘속환(速還)’을 뜻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원효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김유신에게 알렸다.

알아보니 당나라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고구려 군대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원효는 칼을 쓰지 않고도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던 신라군의 목숨을 지혜로 구했다.

환속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계율을 어긴 원효는 검은 승복을 벗고 세속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중이 아 니라 속인이라고 한 것은 스스로를 낮춘 것이었다.

고구려 고승, 보덕에게 배웠던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대중교화에 나선 것이다. 

어려운 한문 경전을 쉽게 풀이 했고,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아미타극락정토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며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이 땅에 정토가 실현된다고 설법했다. 

뽕나무농사를 짓는 늙은이와 옹기장이나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원효는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광대가 바가지탈을 쓰고 춤추며 노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착상을 얻은 원효는 스스로 광대로 분장해 악기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 생사를 벗어났도다
(一體無碍人一道出生死)

『화엄경(華嚴經)』 구절을 담은 이「무애가(無㝵歌)」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널리 퍼졌다.

원효의 무대를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원효는 춤과 노래로 민중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했다. 광대들이 생계에 타격을 입을 정도여서 원효가 무대를 접었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효에게는 더 이상 산속과 저잣거리가 다르지 않았다.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 주막이나 푸줏간, 기생집을 드나들었고 여염집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칼로 글을 새기기도 했고, 사당에 가서 거문고를 연주하기도 했다.

명산대천을 떠돌며 좌선하며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수행했다.

소성거사 시절의 원효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훗날 고려시대 이규보가 한 사찰에서 소성거사의 진영을 보고 두 번 절한 뒤 시를 썼다.

머리를 깎아 맨머리면 원효대사요(剃而髡則元曉大師)
머리를 길러 두건을 쓰면 소성거사로구나(剃而髡則元曉大師) 
몸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나타낸들(雖現身千百)
손바닥 가리키듯 명백할 뿐이네(如指掌耳) 
비록 두 모습이지만(此兩段作形)
한바탕 연극인 것을(但一場戲)

평생의 도반, 의상

당나라 유학길에서 헤어지고 10년이 흐른 뒤 원효와 의상은 다시 만났다.

의상은 9년 동안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금의환향해 신라에 화엄종을 개창했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았지만 혼자서 공부해 그가 당 나라에 가서 현장에게 배우고 싶었던 유식학의 대가가 되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가 되었다.

의상이 귀국해 동해 바닷가 암굴에서 관음보살의 현신을 본 뒤 낙산사를 지을 무렵, 그 소식을 듣고 원효가 찾아갔다.

원효는 낙산사로 가는 길에 들판에서 가을걷이를 하는 여인과 빨래터에서 개짐(생리대)을 빠는 여인을 만나 수작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들이 모두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의상이 암굴에서 부처와 씨름하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관음보살의 현신을 보았다면, 원효는 도반 의상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구도의 길이었다.

원효에게는 길에서 만나는 중생들이 관음보살의 화신들이었다.

두 사람은 방법은 달랐지만 이 땅에 관음보살의 자비를 실현하려는 열망은 다르지 않았다.

원효와 의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원효가 명망과 특권을 내려놓고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중생을 구제했다면, 의상은 귀족불교의 벽을 허물며 하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도 기회를 공평히 주는 개혁을 단행했다.

골품제의 신분질서가 확고하던 신라에서 자신이 창도한 교단 안에서나마 평등을 이루려 했던 의상의 노력은, 기층 민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교화를 펴며 극락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원효의 행보와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한국 불교계의 두 산맥, 원효와 의상이 살았던 시대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나중에는 당나라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을 치르던 대혼란기였다.

비록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지만,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반도와 함께 고구려 백성을 잃는 미완의 통일에 그치고 말았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분열과 갈등이 깊어졌으며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시대를 열 전망을 찾는 길에서 두 사람은 큰 사상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원효가 약관이던 636년(선덕여왕 5년) 여왕이 병이 나자 황룡사에서 국가행사인 ‘백고좌대회(百高座大會)’를 열어 백일 동안 『인왕경(仁王經)』을 강연하고 100명의 승려를 출가시켰다.

경산사람들의 천거로 원효도 왕의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법회 참석을 반대하는 승려들 때문에 원효는 결국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훗날 문무왕 때 왕후가 종기를 앓았는데 백약이 효험이 없어 나라에서 의원과 약을 구하러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 일행이 『금강삼매경』을 얻어 돌아와 풀이할 수 있는 고승을 찾았는데 주석할 승려가 없었다. 이때 대안이 원효를 추천했다.

원효가 주석서 3권을 써서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하게 되었다.

왕실을 비롯해 대신들과 전국 사찰에서 올라온 명망 높은 고승 앞에서 원효는『금강삼매경』을 강의했다. 교만한 고승들의 입에서 탄복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효대사의 높은 사유 경지와 치적을 알려주는 고서. 매경론(월정사 인출본) [사진=경산시청]
원효대사의 높은 사유 경지와 치적을 알려주는 고서. 동문선 권83(법화경종요서) [사진=경산시청]
원효대사의 높은 사유 경지와 치적을 알려주는 고서. 삼국유사 원효불기 [사진=경산시청]
원효대사의 높은 사유 경지와 치적을 알려주는 고서. 원효 해골물의 깨달음이 실린 종경록 권11. [사진=경산시청]

강의가 끝나자 원효가 지난 일에 빗대어 농담을 던졌다.

“지난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낄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 구나.”

고승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학문

원효는 671년 7월 16일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判比量論)』탈고를 마쳤다.

『판비량론』은 현장과 그의 제자들의 논증방식인 비량(比量)을 비판한 책이다. 당시 현장은 동아시아 불교계를 이끌었던 최고 지성이며 명실상부한 최고 권위자였다. 

학문의 권위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유학파, 비주류였던 원효였기에 오히려 해낼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원효는 현장의 책에서 논리적 오류를 찾는데 그치지 않고 올바르게 논증하는 방식을 창의적으로 고안했다.

『판비량론』을 읽은 당나라 학승들은 원효를 5 세기 인도의 불교논리학자인 진나(陳那)에 비유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금강삼매경』을 강의한 뒤 원효는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만 전념했다.

경전에 달아놓은 주석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소가 책상자에 가득 찼다. 그가 경전을 요약한 종요는 쉽고 명쾌했다.

원효는 경론에 주석을 달아 100여 부 240권의 책을 썼다. 그중 오늘날에 전하는 것은 20부 22권이다.

동아시아를 아우르다

분황사에서 『화엄경』의 주석을 달던 원효는 그의 생명의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근방의 혈사로 옮겼다.

혈사는 그가 당나라 유학길에 비바람을 피해 들어갔던 토굴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깨달은 뒤 신라로 돌아와 발바닥에 물 집이 터지고 나중에는 두껍게 굳은살이 박인 채 천촌만락을 다니며 대중 교화에 힘쓰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금강삼매경론』에서 그가 역설했던 수레의 두 바퀴,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이루려 했던 그의 삶은 이제 저물고 있었다.

그는 일흔 살을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법명처럼 원효는 한국 사상의 첫 새벽을 열었다. 신라가 그를 낳았지만, 그의 그릇은 신라를 넘어서 동아시아를 아우를 만큼 넉넉했다.

그의 저서는 중국과 일본, 멀리는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한 원효의 책은 특히 일본에 전해져 오랫동안 일본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특히 해동소(海東疏)라 불리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중국 고승들이 즐겨 인용했는데,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승불교 교과서가 되었다.

최근 8세기에서 1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승기신론소』필사본이 중국 돈황 고문서 속에서 발견되어 중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새삼 반증해주었다. 

원효는 당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던 신라 불교 이론을 화쟁사상을 통해 하나의 이론으로 융합시켰는데, 원효가 화쟁사상을 펼친 『십문화쟁론』은 명성이 자자해 범어로 번역돼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또 그의 사상은 시간을 초월해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과 일연, 조선 유학자인 김정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13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예술작품으로 창작되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원효의 사적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민중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동안 끊임없이 새롭게 재해석된 원효 설화는 시대를 초월해 민초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원효의 생명력을 새삼 확인해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원효의 화쟁사상은 여전히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분황사에서 있었던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지금은 불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어디를,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당나라 유학길을 접고 신라로 돌아온 뒤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경전을 쉽게 풀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던 원효 삶의 압축판이다.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붓다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던 무애사상의 실현이었다.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만인의 불심을 깨우며 신라인들의 마음에 극락세계를 꿈꾸게 한 원효의 구도행이었다.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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