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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4-21 18:04 (수)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1.03.06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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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즈음 새로운 세상을 다스릴 이념이 필요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왕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치이념으로 유학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려운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일반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신라 현실에 맞는 문자가 필요했다.

이두(吏讀)

당시 신라는 어려운 중국문자를 쓰고 있었는데, 한자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라 고유어를 표기할 수 없어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신문왕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수용하고 행정조직을 바꿔야 하는 과도기였다.

중앙관서의 업무는 늘어났고, 영역이 확대된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다시 정비되어야 했다.

유교이념을 전파하고 늘어난 행정업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자의 출현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 이두(吏讀)이다.

설총 이전에도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려는 시도가 있긴 했다.

그러나 초기 이두는 우리말의 순서가 반영되지 않고 원하는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설총은 이제까지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불편한 점을 보완하고 표현에 막힘이 없는 이두를 완성했다.

완성된 이두로 설총은 유교 경전을 해석했는데, 그의 경전 해석은 고려 후기 주자학이 들어올 때까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후세사람들이 설총의 경전 해석을 사오백 년 동안 꾸준히 읽고 배우게 되면서, 경전 해석에 쓰인 언어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대를 넘어 퍼져나갔다.

이두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 문자사에서 차지한 밀도와 시간을 볼 때, 설총이 이룬 이두의 완성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한글 창제와 설총

설총이 세상을 떠나고 700여 년이 지난 1444년,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세종이 말했다.

“설총이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은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던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세종은 700년 전의 신라 사람 설총을 부활시켰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때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세종이 있었듯이 이두가 완성된 것도 설총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설총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삼국사기 권46 유학열전 편. [사진=경산시청 제공]
설총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제왕운기 홍유후 이서 편. [사진=경산시청 제공]

국학

신문왕은 기관 정비를 어느 정도 마친 뒤 682년(신문왕 2년)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에 최고 책임자인 경(卿)을 한 사람 두어 위상을 높였다.

경을 어떤 인물이 맡았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아찬 이하인 사람이 대상이었으므로 6두품 출신도 임명될 수 있었다.

태학이 설립될 당시 활동하고 있던 강수나 설총이 초대 경으로 임명되었을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국학 설립을 왕권과 6두품의 결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설총이 “후생을 훈도 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볼 때 실제 교수를 담당했던 박사나 조교에 머물렀을 수 있다.

설총이 「풍왕서(諷王書)」를 짓자 신문왕이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가 6두품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이때 받았다는 높은 벼슬은 국학의 비중 있는 자리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설총은 강수와 함께 국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유학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나라와 당나라 유학을 수용했는데, 신라도 왕의 절대 권위를 뒷받침하는 당나라 유학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한나라와 당나라 때는 경전의 구절과 글자의 의미를 새기는 훈고학(訓詁學)이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유교 경전이 소실되자 없어진 경전을 찾아내 정리하고 위서들을 찾는 작업이 훈고학의 발달로 이어졌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설총이 “우리말로 중국과 동방의 지방풍속과 사물 이름을 막힘없이 알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풀이했다.”고 한 것은 설총의 학문이 훈고학 계통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설총은 유교 경전을 해독하는데 필요한 지방의 풍속, 사물의 이름을 풀이하는 훈고학 지식에 밝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유교 경전을 신라말로 풀이해 국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설총은 훈고학적인 방법으로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한 최초의 학자라 할 수 있다.

설총의 경전풀이는 고려시대까지 전해졌다.

『삼국사기』에는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어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는다.”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육경과 문학을 풀이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으로 삼는 자가 전수해 끊이지 않는다.”고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설총의 경전풀이는 『삼국사기』가 기록된 12세기 중반은 물론 『삼국유사』가 기록된 13세기 후반에도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 성리학에 역할을 물려주며 역사적 소임을 다할 때까지 사오백 년 동안 후대 유학자들은 설총을 높이 우러러보며 그가 해석한 경전을 따라 배웠다.

화왕계

우화는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짤막하면서도 촌철살인의 지혜를 준다.

우리나라에는 전해지는 우화가 많지 않다. 오늘날 전하는 우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 「풍왕서」라고도 불리는 설총이 쓴 「화왕계(花王戒)」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도 그치고 남풍이 불어 시원한 여름날, 신문왕이 문장가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집권 초기 유혈 숙청극을 벌이며 전제왕권을 다진 신문왕 앞에서 6두품 출신의 설총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잘못 말을 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궁궐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이 설총의 눈에 들어왔다. 설총은 허구라는 장치를 빌려 꽃에 빗대어 에둘러 풍자하는 우화라는 방식을 택한다.

화왕 모란이 아름답게 피어나자, 꽃의 정령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투어 달려와 왕을 배알했다.

그때 발그레한 얼굴과 옥같이 깨끗한 이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정령이 곱게 단장하고 간들거리며 걸어와서는 얌전하게 다가가 말했다.

“첩은 눈같이 흰 모래벌에 자리 잡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쐬며 마음대로 노닐며 사는데 이름은 장미이옵니다. 대왕의 어진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대왕의 잠자리를 모시려 하옵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뜻을 받아주시려는지요?”

그때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성성한 백발에 지팡이를 짚은 남자 정령이 나타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말했다.

“저는 서울 밖 큰길가에 자리 잡고서 아래로는 아득하게 탁 트인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높이 솟은 산에 의지해 사옵니다. 이름은 할미꽃(백두옹)이라 하옵니다.”

이 범상치 않은 백두옹은 약상자 안에는 원기를 보충하는 좋은 약 뿐만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 독을 없애는 독침도 준비해두어야 한다고 왕에게 고언한다.

실과 삼베가 있더라도 없을 때를 대비해 왕골이나 띠풀을 버리지 말라면서 말이다. 그러자 화왕 가까이에 있던 신하가 끼어들며 왕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두고 누구를 보내시렵니까?” 왕은 혼란을 느낀다.

“노인장의 말도 이치에 닿는 말이지만, 어여쁜 사람은 얻기가 어려우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을 없앨 독침도 준비해두라고 완곡하게 말하던 백두옹은 간신배의 등장으로 왕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저는 대왕이 총명해 의리를 아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군요. 임금 된 사람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이가 드뭅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우한 신세로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머리가 세도록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옛날부터 사정이 이런데 전들 어찌하겠사옵니까.”

비로소 화왕은 잘못을 뉘우쳤다.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설총의 이야기를 듣고 난 신문왕은 서글픈 빛을 띠며 말했다.

“그대의 우화는 참으로 뜻이 깊구려. 이 이야기를 기록해 앞으로 임금이 된 자가 경계로 삼도록 하겠소.”

신문왕이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진다.

그러나 우화의 내용과 현실은 달랐다.

설총은 골품제에 막혀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은 한계가 있었다. 5품 대아찬부터 1품 각간의 요직들은 모두 진골이 독식했다.

우화 속 풍당처럼 설총도 머리가 세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야 했다.

신라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강수가 기껏 8품 사찬에 불과했던 것처럼 실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요직에 6두품은 등용되지 못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아첨하는 간신과 정직하게 충언하는 신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왕을 은근히 풍자하는 이 우화는 신문왕에게 가슴을 파고드는 독침이 되었다.

신문왕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간신과 스스로 독침이 되겠다는 설총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결국 충신을 곁에 두어 나라 기강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오래갈 것이라는 경각심으로 이 이야기를 후왕에게 남겨 경계로 삼으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신문왕은 설총이라는 독침을 얻었고, 평화를 불러오는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의 주인이 된다.

설총은 꽃을 의인화해 인간 세상을 빗댄 이 작품으로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했다. 「화왕계」는 훗날 문단을 달굴 가전체 문학과 의인화 소설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감산사 비문

12세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이미 설총의 문장이나 저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총이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고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으니 끝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

1916년 경북 경주시 감산사 터에서 불교조각의 최전성기였던 8세기에 만들어진 남녀 모양의 불상 한 쌍이 발견되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이 그것이다.

특히 허리를 비튼 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왼손을 들어 누군가를 부르는 관능적인 미륵보살상은 섬세함과 정교함이 뛰어나 지금도 미술사가들의 갈채가 쏟아진다.

이 남녀 모양의 불상이 석굴암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세계적 조각이라는 찬사를 받는 데는 불상 광배 뒤에 새겨진 장문의 명문(銘文)이 한 몫을 했다.

「감산사 아미타불 조상기」가 그 주인공이다. 이 명문의 내용은 깊이가 있고 진솔하면서도 세련되었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이 ‘나마 벼슬을 한 총(聰)’이라고 명시하고 있어 당시 필력을 떨쳤던 문장가 설총이 쓴 글임을 알 수 있다.

성균관 문묘에는 공자 및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유학자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설총도 그중 한 명이다. [사진=경산시청 제공]

감산사는 719년(성덕왕 18년)에 김지성(金志誠: 또는 김지전, 652∼720년)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신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김지성은 6두품으로 집사부 시랑을 지낸 인물이다. 김지성이 세상을 뜬 부모를 추모하려고 절을 짓고 돌 아미타상과 돌 미륵상을 만들어 바친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불교를 중히 여겨 무착(無著: 4세기 간다라에서 대승불교 경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쓴 고승)의 심오한 깨달음을 얻기를 빌었다.

예순일곱 살에 한가한 시골 밭으로 돌아와 5천 단어의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펼쳐 읽으니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심오한도에 들어온 듯하고 법문을 연구하니 색과 공이 무너져 함께 사라져버린다.”

불교와 유교, 도교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묻어나는 이 명문은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당시 8세기 신라 지식인이 어떤 삶을 꿈꾸었는지를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삼국유사』도 감산사에 조성된 두 불상에 새겨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내용은 1915년에 발견된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광배 뒷면의 내용이 좀 더 자세하고 구체 적일 뿐 『삼국유사』 내용과 거의 같다. 일연도 감산사를 방문해 이 불상들의 명문을 확인했을 것이다.

「감산사 아미타불 조상기」는 「화왕계」와 더불어 품격 있는 설총의 문학세계를 엿보게 한다.

원효와 설총

갈등과 전쟁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에 살았던 원효와 평화를 되찾은 시기에 살았던 설총은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다른 시대를 살면서도 아버지의 유산이 아들에게 이렇게 아름답게 대물려진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원효가 살았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전쟁에 온 역량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원효의 고향 경산은 전략적 요충지가 되면서 신라군의 모병훈련소와 군사주둔지가 세워졌다. 원효의 아버지 담날(談捺)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원효는 어머니를 여의고 삶과 죽음에 영적인 통찰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를 불교에 귀의하도록 인도했다.

승려가 된 뒤에도 원효는 전사자와 부상병, 유가족이 넘쳐나는 고향에서 종교인의 책임을 통감했고 이것은 그를 민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교화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반해 설총이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가 통일전쟁을 끝내고 분열된 민심을 수습해 흩어진 역량을 결집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기반을 닦아야 하는 시기였다.

시대 요구에 부응해 설총은 이두를 완성했고 유교 경전을 풀이해 500년의 생명력을 지닌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가르쳤다.

또 교언영색에 익숙해진 왕에게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

설총이 우리말로 유교 경전을 읽고 풀이한 데는 원효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가 난해한 불교 교리를 쉽게 풀어서 대중에게 설법한 것처럼 설총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이두를 이용해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서 널리 전했다.

원효가 불교를 신라화하는데 기여했듯이, 설총은 유교 경전을 우리 식으로 풀이하는 방법을 만들어 유학을 한국적으로 수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원효가 신라가 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종교가로서 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하려 했다면, 설총은 신라가 통일전쟁을 완수하고 평화에 안착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다. 

설총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늘지고 낮은 세계를 돌아보는 원효상을 만들었다. 설총은 원효가 걸어간 길을 아름답게 다져 후세에게 그 길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