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정태성 행동경제학연구소 대표】 우리나라는 유독 유행을 많이 타는 듯하다.

트렌드에 민감한 민족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유행에 얼마나 민감한지에 대해 국가 간 비교연구를 한다고 하면 아마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명품을 포함한 각종 상품에서도 그렇지만 정부 정책 또한 그러하다.

최근에 수행하고 있는 정부 용역을 위해 창업 관련한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육성하고자 하는 산업에 대한 정부정책이 너무 트렌드를 쫓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대세였던 2~3년 전에는 메타버스 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최근 들어 챗 GPT가 휩쓸고 가니 그와 관련된 산업 지원도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정부 정책 뿐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에 대한 우려도 마찬가지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잔혹한 범죄 말고도 범죄로 인해 희생된 사연이 안타깝게 소개되면 그 범죄에 대한 관심도가 쭉 올라간다.

예를 들면, 학폭 (학교 폭력)이 그렇다.

학폭은 예전에도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잊혀지는 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지만 학폭 연예인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학폭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뉴스에 소개되기 시작하니까 학폭이라는 범죄에 대한 관심이 부쩍 올라갔다.

최근에는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학폭 사건으로 인해 더욱 이슈가 되었으며,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학폭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은 지대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학폭이 우리 생각보다 꽤나 자주 일어나는 것이며 매우 심각한 범죄라고 인식하게 되었는데, 사실 우리는 최근에 보고 들은 것들, 내 기억이 가용한 범위 내에서 생각한다는 ‘가용성 휴리스틱’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착안하여 우리 회사의 데이터분석팀은 음주운전과 스포츠 구단들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데이터 분석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2018년 9월, 혈중알코올농도 0.181%의 만취운전자가 횡단보도에 대기 중이던 윤창호군을 충격하여 결국 사망하게 만든 사건,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전국민적 관심 속에서 소위 윤창호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2018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비교하였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스포츠구단들의 음주운전 선수에 대한 대응방안과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스포츠 구단들의 대응방안을 비교한 결과, 2018년을 기점으로 음주운전 선수에 대한 구단과 협회 차원의 대응이 매우 신속하고 강력하게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공론화된 범죄행위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심각하게 인식되어 즉각적이고 강력한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범죄에 대해 실질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판사들도 그러한 성향이 있을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해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두 가지 유사사례를 소개해 보자.

하나는 최근 발간된 대니얼 카너먼의 ‘노이즈’에 실린 내용이다.

미국에서 판사들의 양형이 일관성이 없을 수도 없다는 이유로 ‘양형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양형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판사들의 양형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한 적이 있다.

연구원들이 16개의 가상 사건을 만들고 90분간 208명의 현역 연방 판사들에게 형량을 구형하도록 했는데, 사건별로는 3.4년의 형량 차이가 났고, 판사별로는 2.4년의 형량 차이가 났다.

즉, 특정 사건에 대해서 판사들의 형량은 일치하지 않았고, 심지어 시간을 달리해서 사건을 보여줄 때에는 양형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다.

우리가 범죄에 대해 판단을 무조건 신뢰해야 하는 판사에게서도 이러한 편향과 노이즈 (잡음)가 나타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넛지의 공동저자로 알려진 캐스 선스타인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판사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current offence bias’라고 했는데 이는 판결이 아닌 보석에 관한 오류이지만 내용은 흥미롭다.

판사들이 보석결정을 내릴 때, 그 사람의 재범 여부보다는 현재의 범죄 행위에만 너무 집착하는 편향을 보인다고 한다.

보석은 구속 중인 피고인을 석방하는 제도인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재범 위험이 높은 사람이 현재 가벼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보석이 쉬워지고, 재범 위험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중범죄로 기소되었을 경우에는 보석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판사들은 많은 정보를 고려해서 보석 여부를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현재의 범죄만 가지고 보석을 판단하는 그러한 편향을 보인다는 얘기이다.

볼 수 있듯이 가장 편향이 없어야 할 직업인 판사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편향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재판뿐 아니라 ‘판단’을 요하는 많은 분야에서 판단을 AI에게 맡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 챗 GPT의 등장으로 그러한 주장은 더욱 신빙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부분을 경계해야 한다.

AI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는 인간이 관여한다는 점, 그리고 AI가 학습하는 여러 정보들은 이미 인간의 편향이 들어가 있는 정보라는 점이다.

최소 이 두 가지 전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 필자소개 :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의 전략, 마케팅과 스포츠 마케팅, 공공부문의 정책입안 등 다양한 컨설팅 업무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컨설팅 결과가 인간의 심리나 행동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고민을 하던 중, 행동경제학자인 서울대 최승주교수와 빅데이터분석 권위자인 한양대 강형구 교수와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정부와 기업 대상 행동경제학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강연 및 행동경제학 관련 칼럼과 영상을 통해 행동경제학을 보다 알기 쉽게 전파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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