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년) 안동부사 김우옹이 권벌을 추모하여 건립한 삼계서원.
1588년(선조 21년) 안동부사 김우옹이 권벌을 추모하여 건립한 삼계서원.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22일, 경복궁 충순당에서는 중신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제2계비 윤씨)와 문종이 앉고 그 아래 문무백관들이 도열했다.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문종의 나이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때문에 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임금을 위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소문을 따져보기 위함이요. 누가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소?”

낮지만 묵직한 문정왕후의 목소리가 충순당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조판서 이기가 먼저 나섰다.

“찬성 윤임이 주상을 물리치고 다른 인물을 옹립하려 했다하옵니다. 이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엄중하게 조사하여 큰 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병조판서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번에는 지중추부사 정순붕이 나섰다.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도 윤임과 함께 역모를 모의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소상하게 조사해서 엄벌을 내려야 합니다.”

지중추부사의 말이 끝나자 공조판서 허자와 호조판서 임백령 등이 차례로 나섰다. 이들은 앞을 다투어 윤임과 그 일파를 대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기세에 눌려서 다른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임금과 대비를 겁내지 않은 대신

1519년(중종 14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숙청했던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사림세력이 약화되자 김안로와 권신들 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벌어졌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는 문정왕후를 폐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을 가서 사사되었다.

김안로가 실각하자 정권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외척으로 옮겨갔다.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윤여필의 딸)는 세자(훗날 인종)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정에서 일대 논란이 벌어진 끝에 1517년(중종 12년)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서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을 낳았다.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와 윤원형은 장경왕후의 아들을 물리치고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은 이러한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차기 정권을 결정짓는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윤임 일파와 윤원형 일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조정은 윤임을 따르는 대윤(大尹)과 윤형원을 따르는 소윤(小尹)으로 양분되어서 세력 다툼을 일삼았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병약했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명종의 나이 겨우 열한 살이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 넘어갔다.

윤원형은 정적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첩 정난정을 시켜서 대윤파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문정왕후에게 고했다. 이에 문정왕후가 충순당에서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기세가 워낙 등등해서 충순당에 모인 대신 들은 감히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권이 바뀐 지 겨우 한 달, 새로이 권력을 거머쥔 세력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반대하거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충순당의 적막을 깨고 나이 지긋한 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있던 권벌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주상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기에 선왕의 대신들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국가 격변기에 백성을 불안에 빠트리지 않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그 죄가 확실한지를 충분히 따져본 후에 처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디 주상 전하의 명예에 누가 없도록 하시옵소서.”

권벌이 홀로 나서서 대윤 일파를 변호하는 것은 그들을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임금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대대적인 숙청을 하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충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벌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대윤 일파를 탄핵하려는 소윤 일파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충순당에서 중신회의가 있은 지 며칠 후, 권벌은 명종에게 장문의 글을 올려서 윤임 일파의 죄명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권을 쥐고 있는 세력과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순여덟 살의 노대신 권벌은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목숨보다 더 중요시했던 것은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였다. 의리와 명분에 어긋난 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했다. 때문에 권벌은 무척 진지하고 비장했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명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새벽 관대를 하고 바깥마루에 나와 앉은 권벌은 궁궐로 들어가기 위해 가마를 재촉했다. 아내와 자식들이 ‘왜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궁궐에 들어가려고 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권벌은 ‘윤임 일파의 처벌이 부당함을 알리는 계사(啓辭: 죄를 논하기 위해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바치기 위해서다’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아내와 자식은 권벌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극구 만류했다. 권벌이 듣지 않고 가마를 출발시키려고 하자 딸이 소매를 잡으며 통곡을 했으나 뿌리치고 갔다.

이때 권벌이 바치려고 한 계사에는 ‘대비(문정왕후)는 일개 부인일 뿐이며 임금(명종)은 아직 어린 아이이다. 선왕의 대신을 귀양 보내려고 하는데 그 죄가 불분명하니 반드시 하늘의 진노가 있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승정원 원상으로 있던 이언적이 이 계사를 보고난 뒤에 ‘어찌하여 시기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윤임은 구제할 수 없습니다. 이 계사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공만 화만 입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붓을 들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구절들을 지워버렸다. 그러자 권벌이 벽을 치며 ‘그렇게 한다면 계사를 올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오!’라고 탄식을 했다.”『(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 26일)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미 소윤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 대윤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윤을 처벌하는 것은 명분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권벌은 생각했다. 그것은 새롭게 왕위에 오른 임금의 국정운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민심을 어지럽히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권벌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대윤을 변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권벌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소윤 일파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처형되거나 유배를 가서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1547년(명종 2년), 동생 윤원형과의 정권 쟁탈전에서 패한 윤원로마저 사사당하고 대윤 일파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丁未士禍)라 고 한다. 을사사화를 기점으로 5~6년 동안 윤원형에 의해 숙청된 반대파와 사림세력은 1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윤원형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수렴정치의 폐단은 점점 심해졌다. 임금 못지않은 권력과 부귀를 누리던 윤원형은 1565년(명종 20년)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몰락했다. 그 뒤 사림세력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조정은 사림파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조선 전기에 몇 차례 사화를 거치면서 훈구세력과 외척에 의해 피해를 당한 쪽은 대부분 사림세력이었다. 사화의 영향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사림세력은 고향에 은둔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은둔한 사림들이 세운 서원은 학문의 도장이자 정론의 광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다음 회에 계속)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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