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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⑭] '캔버스 앞의 구도자' 남관(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⑭] '캔버스 앞의 구도자' 남관(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4.0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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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인물들 - 경북편
남관 화백.
남관 화백. [사진=남관기념사업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한국 대표 추상화가 중의 한 사람인 남관(南寬)은 1911년 11월 25일 경 북 청송군 부남면 구천동에서 태어났다.

촌장을 지낸 부친 남영환과 모친 하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매 중 맏아들로 위로는 누님과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다.

어려서는 선조들이 모여 살았던 안동시 길안면에서 성장하였으며 다섯 살 때부터 동네 서당을 다녔다.

어린 나이지만 서당에서 한 문을 배우는 것이 매우 따분했던 남관은 여섯 살에 부남보통학교에 다니 다가 9살에 청송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절부터 손재주가 뛰어 나 종이나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의 그림은 종종 수작으로 뽑혀 교실에 붙여졌다.

청송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보로 진학하려 했으나 학생 스트라이크 운동에 연루되어 입학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너는 도화를 잘 그리니 소질을 살려 더 공부해보라”며 평소 그의 그림 실력을 인정하고 격려해주던 교장 선생 후에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한국인 유학생은 대략 350명 정도였고 이들은 이후 한국 근현대미 술사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1920년대를 전후해서 서구 미술도 입에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인상파,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와 입체파를 포함한 이른바 ‘에콜 드 파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1925년 열네 살의 나이로 동경에 도착한 그는 보통학교 선배인 이상우 (니혼대학)를 찾아가서 김영대(릿쿄대학 영문과 재학) 등의 도움을 받으며 1년 간 진학준비를 거쳐 와세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와세다중학교 3년을 마친 뒤 당초 계획대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 (太平洋美術學校) 본과에 입학하였다.

교장 나카무라 선생 등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1935년 본과를 졸업하고 이어서 2년 과정의 연구과 수업을 받아 탁월한 데생실력과 구성력을 갖추게 된다.

태평양미 술학교는 1902년 설립된 태평양회화(太平洋繪畵)연구소의 후신으로 1929 년 미술학교로 승격되면서 태평양미술학교로 개칭하였고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때 학교도 문을 닫았다.

당시 관학의 대표인 동경미술학교가 색조 분위기를 중시하는 외광파적 아카데미즘을 지향한 데 반해 사학인 태평양미술학교는 형태와 데생을 중시하는 고전적 아카데미즘을 지향했다.

태평양미술학교는 관학인 동경미술학교와 쌍벽을 이루며 일본 전위 미술의 기초를 놓은 화가들을 배출했다.

테평양미술학교를 거쳐간 한국인 화가로는 야수파와 입체파 화풍을 혼 합한 듯 개성 넘치는 화풍을 구사한 구본웅이 선배였고 인물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병덕, 박득순, 손응성, 최재덕 등이 후배다.

남관은 1939년에 구마오카 요시히코가 운영하던 ‘구마오카미술연구소(態岡美術硏究所)’에 들어가 1945년 해방까지 10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다.

구마오카는 인상파적인 색조를 사용하여 사실적인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했던 작가로 남관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향을 많이 준 것으로 보인다.

남관은 이곳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시절 그린 작품들을 동광회(東光會), 국화회(國畵會), 문전 (文展) 등에 출품하였고, 동광회 회원으로도 추천되었다.

1942년 <노인상>으로 후나오카상(船岡賞)을, 1943년 <여인 좌상>으로 미츠이상(三井賞)을 수상하여 작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당시 남관은 풍경화 보다는 인물화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을 주로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1940년대의 작품은 대부분 분실되어 남아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

다만 초기 작품으로 볼 수 있는 1943년 작 <검도복의 소년>과 1946년 작 <파이프가 있는 정물(靜物)>을 통해 세잔의 영향을 깊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남관은 가장 인상적인 작가로 세잔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학창시절부터 세잔의 분위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그의 <붉은 조 끼의 소년> 같은 작품에 깊이 빠졌던 생각도 납니다. 동경에서의 후 나오까 상을 받은 것도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남관, ‘이그러진 인간상의 비밀’, 중앙갤러리 개관기념전시 <남관 창작 50년의 예술세계> 도록, 1984.11)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과감히 생략하여 색면으로 구성하거나 물감을 사용할 때 반투명 효과를 낸 것이 남관 작품의 특징으로 이때부터 일관 된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20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남관은 자연스럽게 일본적 감성을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후천적으로 획득하게 된 일본적 감성과 1930년대 중반 일본미술계의 전위적 분위기, 그리고 태평양미술학교에서의 수학은 작가로 서의 그의 삶에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그의 작품 경향을 완성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끊임없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한국적 근원에 대한 고민 역시 함께 싹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서울에서의 활동

해방이 되자마자 귀국한 남관은 서울에 정착하여 국내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에는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남관은 국내 미술계에 서도 작가로서의 역량과 위치를 인정받아 1948년 열린 ‘조선종합미술전’에 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8월에는 좌익 미술동맹에서 이탈한 이쾌대, 이인성, 이규선 등과 순수 미술 지향의 ‘조선미술문화 협회’ 창립에 참가하고, 1949년 첫 국전(國展)이 열릴 때에는 서양화부 추천작가로서 <해바라기>를 출품하는 등 어수선한 정국과 좌우익 대립의 와중에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워가고 있었다.

또한 1948년부터 1951년 까지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제자들을 키워냈다. 1950년에는 김병기, 김영주, 김환기, 박고석, 유영국, 이봉상 등과 ‘50년 미술협회’를 발족시키지 만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무산 되었다.

1950년에 열렸던 개인전이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에 끝나는 바람에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남관은 흑석동 화실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된다.

그가 겪었던 두 번의 전쟁, 즉 일본에서 겪은 태평 양 전쟁과 6·25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의 뇌리에 트라우마로 박혀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

눈앞에서 목도한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적 체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바탕인 기본적 정서이자 영감의 뿌리가 되어 화 면 위에서 두고두고 되살아나게 된다. 남관 자신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 이 술회하고 있다.

“나의 그림은 현실과 꿈, 기억의 만남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젊은 시절에 전쟁을 치룬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온다. 벌판에 쓰러진 젊은 병사의 얼굴, 토막 나 뒹구는 팔다리, 시체 위로 쏟아지는 햇볕, 전란으로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 얼굴들을 나는 길가다가 땅 위에 구르는 이끼 낀 돌 위에 서도 보고 고궁의 퇴색한 돌담에서도 본다. 나는 들에서 참으로 많은 역사를 본다.

고향 청송의 부남 구천장터를 배경으로 한 1951년 작품 '고향의 노인들'. [사진=남관기념사업회]
고향 청송의 부남 구천장터를 배경으로 한 1951년 작품 '고향의 노인들'. [사진=남관기념사업회]

태곳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닳고 버려져서 지금에 있 고 또 미래에도 남을 돌과 온갖 풍상을 겪고도 살아남는 인간의 얼굴 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의 얼굴이다. 얼굴 속에 숨어있다. 때때로 어떤 현상과 만날 때 나타나는 기억들을 뽑아내어 마치 가면을 쓴 듯한 인간의 얼굴을 그리게 된다.” (남관, ‘꿈의 나라 『조선일보』, 1973. 10. 27)

즉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관의 작품세계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데 이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주제의 모티브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피난길에서 본 벌판에 널브러진 시체들, 잘려진 사지와 고통으로 일 그러진 병사들의 얼굴, 포화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들, 그리고 종군 화가단에 합류해서 만났던 갖가지 주검과 전쟁의 참상을 겪는 천태 만상의 인간상들은 후일 그의 작품 속에서 가면(마스크)의 형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뒤늦게 간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전시 미술전’과 ‘3·1 기념미술전’ 등의 전시를 계속하던 남관은 선원들이 가져와서 팔던 일본 신문에 보도된 마 이니치신문사(每日新聞社) 주최 국제미술전 기사를 보고 일본행을 꿈꾸다가 당시 외무부장관을 하던 변영태와 후쿠시마 시게타로의 도움으로 전 쟁 중인 1952년에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미국, 프랑스 등 6 개국이 참가한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동경비엔날레)’을 동경도미술관에서 관람한 남관은 새롭고 격동적인 국제 미술사조에 충격을 받게 되고 새로 운 창작의욕에 불탔다.

다음해인 1953년 동경(東京)의 포름화랑에서 개인 전을하게 된 남관은 화랑 주인인 후쿠시마 시게타로의 주선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남관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피난시절이었다. 부산엔 일본신문과 소식이 넘쳤다. 52년 동경에서 비엔날레가 열린다는 소식도 그래서 알았다. 배를 타고 일본에가 서 그 거대한 국제전 마지막 날을 보았다. ‘프랑스’ 것에의 흥미를 그때 느꼈다. 새로운 미술동향을 목격했을 때 하도 흥분해서 꿈은 무작정 ‘프랑스’로 향했다.”(남관 인터뷰 ‘개안 예술가의 생성 남관’, 『동아일보』, 1969. 1.25)

프랑스 유학을 결정한 남관은 1954년 10월 서울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도불(渡佛)기념전을 열고 총 67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전시는 일본 유학 이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작가 생활의 총결산이며 동시에 새 로운 전환의 계기를 예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때 전시된 작품들은 사실적인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누드에서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반추상계열의 작품들이 총망라 되었다.

프랑스 유학시절

1954년 12월 서울을 떠나 요코하마에서 배를 탄 남관은 한 달이 지난 후에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19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다.

남관의 도불 당시 파리에는 대략 이십 명 정도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예술가로는 이성자(51년), 김흥수(55년), 김중업(54년), 손동진(56년, 이상도 불 연도) 등이 생활하고 있었다.

한국 외교 대표부가 ‘라 스파유’ 거리의 건 물 이층 한쪽을 빌려 태극기를 달아놓고 있을 정도로 초라했고, 조원석 공사대리가 모든 외교 업무를 혼자서 처리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남관 역시 프랑스에서의 정착이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로 오기 전 한국에서 매달 받기로 했던 생활비를 사기 당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사정을 남관은 아래와 같이 토로하였다.

“내가 프랑스로 간 것은 1954년 12월쯤으로 생각된다. 그때는 전쟁이 남긴 상처가 강토의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던 때다. 이러한 조국을 떠나게 된 나의 마음은 처음부터 그지없이 울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일념만으로 나는 도불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때가 내 나이 39세, 한창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할 때였다. 도불하기 전 나는 가산을 처리한 돈을 어느 회사에 맡겨두고 매월 일백 달러씩을 받기로 했으나 약속이 어긋나 3개월 만에 송금이 끊기는 바람에 우선 밥벌이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에서 맨손으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사실 매우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우선 나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인 화가 들이 들어가는 연구소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에 적을 두었다.

이 연구소는 국적과 연령에 관계없이 화가로 인정되는 외국인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전통 있는 미술연구기관으로서 연구 코스가 끝나면 자격증을 수여했다. (여기서 나는 3년 동안 공부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을 하면서 나는 틈나는 대로 밥벌이를 위해서 몽마르뜨 거리 나 세느 강변으로 그림을 팔러 나가곤했다. 다른 사람들은 요리점 같은 데서 기꺼이 일하곤 했으나 아직도 한국적인 치레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차마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어서 선물용 그림을 그려서 팔러 다녔 던 것이다.

사실적인 선물용 그림을 그려 파는 일은 생활이 어려운 외국인 화가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프랑스에서는 우유와 빵이 제일 싸기 때문에 나는 서민용 포도주와 함께 그것을 주로 먹었다. 그러나 밥벌이는 항상 어려웠고 그래서 나중에 우울증과 함께 영양실조에 걸려 얼굴이 붓고 머리털까지 빠지기 시작했다. 고독과 내 자신에 대한 회의로 하여 점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남관, ‘원근기’『공간』제6호, 1969)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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