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과 무오사화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고려 말인 14세기에 활약한 학자관료층을 신흥사대부라 일컫는다.

이들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회군 후 이색, 정몽주 중심의 고려개혁 온건 절의파와 이성계, 정도 전 중심의 새로운 국가건설 역성혁명파로 갈라진다.

그 후 역성혁명파는 고려의 우왕과 창왕, 공양왕을 차례로 시해한 후 조선을 건국하고, 절의파는 정몽주, 이색, 이숭인처럼 역성혁명파에 의해 살해되거나 두문동 72현, 그리고 길재처럼 벼슬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숨어들게 된다.

고려 말 신흥사대부에는 원초유학을 익힌 유학자와 성리학자가 섞여 있었다. 원초유학은 공자와 맹자, 순자를 중심으로 한 유학을 말한다.

그리고 성리학은 원초유학과 훈고학 등에서 다루지 못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가미한 유학의 한 분파로, 정주학, 도학, 성명학 등으로도 불린다.

원초유학 중심인 고려에 성리학을 들여와 전파한 사람이 이색이었다.

그렇기에 고려 말 대부분의 성리학자는 이색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들 중 정몽주, 이숭인 등 절의파에 섰던 학자들은 대부분 조선개국 과정에서 소멸하고 정도전, 변계량, 남재·남은형제 등 역성혁명파에 가담한 사람들은 살아남아 성리학 이념을 조선건국에 적용했다.

그러나 1398년(태조 7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고인명덕신민지실학(古人明德新民之實學)」을 성리학적 실천이념으로 내세우고 공명정대한 덕행,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실학을 강조하던 정도전 일파마저 몰락하면서 성리학은 그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때에 혜성처럼 등장해 관학(官學) 중심인 초기 조선에서 사학(私學)을 이끌며 성리학자들을 양성하고 훈구세력 일색인 조정에 신진사류를 대거 진출시킨 인물이 있었다.

바로 영남의 선산(지금의 구미)에서 길재가 길러낸 김숙자(金叔滋), 그리고 김숙자의 학문을 계승한 그 아들 김종직(金宗直)이었다.

김숙자가 활동한 시기는 세종 연간이었다. 당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공을 세운 정난공신, 좌익공신, 적개공신, 익대공신 등의 훈신과 그 후손, 척신 등의 훈구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하기 위해 사학(私學)을 억압하고 사학(四學)과 지방향교, 종학, 성균관 등의 관학을 진흥하여 교수와 훈도를 파견함으로써 조정의 통제 하에 두었다.

학자는 학문만 연구하면 되고 관리는 나라에서 양성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관학에서는 주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 한문학을 가르쳤다.

이색과 정몽주의 도통을 계승한 길재의 제자들이 겨우 동방성리학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김숙자도 관직에 나아가 벼슬을 살지만 훈구세력의 견제로 중용되지 못했고, 한직으로만 돌았다.

어쩌다가 요직에 천거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체직되곤 했다. 김숙자는 그 과정에서 도학정치가 사라진 조선 조정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김숙자는 훈구세력의 부도덕성을 타파하고 나라 근본을 바로세우기 위해 성리학자의 관계 진출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훈구세력이 견고하게 관학을 독점하고 있어서 성리학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김숙자는 사학(私學)으로 관학독점을 깨보려고 시도했지만 1년도 되지 못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숙자의 꿈과 학문을 계승해 영남사학을 개척하고 부흥시킨 사람은 제자이자 아들인 김종직이었다.

영남사림의 종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은 학문의 도덕적 실천으로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아 위민정치사상의 본질인 민본(民本)의 이상실현을 추구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그렇기에 성리학에 있어 존심(存心)과 수양을 매우 중시했다. 수양방법에 있어서는 주자의 주경함양과 격물치지를 취했고, 제자들에게는 독경을 강조했다.

그것은 “함양은 반드시 경(敬)으로 해야 하고, 학문의 진작은 치지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 중국 북송 중기의 유학자 정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 “주경(主敬)으로 그 근본을 세우고 궁리(窮理)로 그 지식을 진전시킨다”는 주자의 거경궁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아버지인 강호(江湖) 김숙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숙자는 고려삼은의 한 사람인 길재의 제자였다. 길재는 정몽주의 문인이고, 정몽주는 이색의 문인이니, 동방의 성리학은 이색이 들여와 정몽주에게 전하고, 정몽주가 길재에게 전한 것을 길재가 다시 김숙자에게 전하고, 김숙자가 아들 김종직에게 전했다.

그들은 정통 성리학(性理學)인 정주학을 학문연구의 기준으로 삼았다. 정주학은 정호와 정이, 그리고 주희로 이어지는 성리학, 즉 도학을 말한다.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세 사람은 군자의 의리론을 앞세워 절의를 지킨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으로,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일컫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고려왕조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성계 중심의 역성혁명파에 맞서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반역에 성공한 이성계의 조선에 살면서 고려의 충신인 길재 문하에서 수학했다. 길재의 도학사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김종직은 그런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므로 조선에 반감을 가진 길재의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랬기에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단종을 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자연스럽게 고려 말 우왕과 창왕, 공양왕을 차례로 해하고 나라를 찬탈한 이성계가 떠올랐을 것이고, 그래서 「조의제문」을 짓게 된 것 아니었을까.

김종직은 1446년(세종 28년) 열일곱 살에 사마시에 응시해 「백룡부(白龍賦)」를 지어 제출한다. 「백룡부」를 본 김수온은 ‘장차 문형(文衡: 대제학)이 될 솜씨’라고 칭찬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김종직이 길재의 학통을 물려받았으므로 그 영향으로 「백룡부」가 시류에 비판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종직은 이듬해 다시 사마시에 응시하지만 또 낙방한다.

훈구세력이 고려 절의파의 학통과 사상을 계승한 성리학자들을 관계에 들여놓지 않으려 애쓴 결과였다.

그러자 김종직은 실력으로 훈구세력의 견제를 뚫겠다는 각오로 형 김종석(金宗碩)과 함께 황악산 능여사에 들어가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그래서 1453년(단종 1년)에 나란히 진사시에 합격하고 형과 함께 성균관에 들어갔다.

김종직이 스무 살 되던 해인 1450년 세종임금이 붕어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적장자 문종(文宗)은 30년간 세자로 지냈지만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세자 단종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조선 제6대 왕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도 수양대군에 의해 위에서 쫓겨났다.

홍귀달(洪貴達)이 기록한 국조인물고 김종직 편 비명 본문.
홍귀달(洪貴達)이 기록한 국조인물고 김종직 편 비명 본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제7대 왕 세조는 1456년(세조 1년) 단종 복위운동을 벌인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여섯 신하를 모반혐의로 거열형에 처하고 70여 명을 유배시켰다. ‘사육신사건’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전(前) 삼군도진무사 최시창과 그 아들 최면 등 수백 명을 모반죄로 연이어 처형했다.

일련의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은 김종직이 성균관에 있을 때 일어났다.

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되고 단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됐다.

김종직은 가까이에서 그것을 보고 들으며 단종에 대해 측은지심을 품게 됐다.

이어서 군국(軍國)의 권력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을 지키려던 충신들을 잔혹하게 죽이며 피의 숙청을 이어가자 마음 깊이 그를 증오하게 됐다.

성리학을 익힌 선비로서 폭군의 등장에도 행동하지 못하고 참아야 했던 양심의 가책은 1457년(세조 3년) 밀성(密城: 지금의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던 중 답계역(지금의 성주군 학산리)에서 쉬고 있을 때 꿈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중국 초나라 의제가 꿈에 나타난 것이었다. 김종직은 꿈에서 깨어 그 감상을 글로 지었는데, 바로 무오사화를 불러온 「조의제문」이었다.

정축 10월의 어느 하루(丁丑十月日)

내가 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는 길에(余自密城道京山)

답계역에서 자게 됐는데(宿踏溪驛)

꿈에 신이 칠장의복을 입고(夢有神披七章之服)

훤칠한 모습으로 나타나(頎然而來)

스스로 말하기를(自言)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楚懷王孫心爲)

서초패왕에게 살해 돼(西楚霸王所弑)

침강에 잠겼다(沈之郴江)

하고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因忽不見)

내가 꿈에서 깨어나(余覺之)

깜깍 놀라 말하기를(愕然曰)

회왕은 남초나라 사람이고(懷王南楚之人也)

나는 동이 사람인데(余則東夷之人也)

땅이 서로 떨어져(地之相距)

무려 만여 리나 되고(不啻萬有餘里)

세대 선후로 봐도(而世之先後)

역시 천 년이 넘는데(亦千有餘載)

감격스럽게도 꿈속에 찾아왔으니(來感于夢寐)

이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玆何祥也)

다시 역사를 되짚어봐도(且考之史)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는데(無沈江之語)

그렇다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공격하고(豈羽使人密擊)

죽여서 그 시체를 물에 던졌다는 것인가(而投其屍于水歟)

알 수 없는 일이로다(是未可知也)

그래서 이제 글을 지어 조문한다.(遂爲文以弔之)

… ()

아아(嗚呼)

큰 세도를 누리는 불연자여(勢有大不然者兮)

우리는 왕을 두려워하며 능히 보좌하는데(吾於王而益懼)

무고를 당하여 젓갈과 포육이 되고(爲醢腊於反噬兮)

과연 하늘의 운으로 밟혀 어그러질 것인가(果天運之蹠盭)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로 솟았는데(郴之山磝以觸天兮)

그림자는 해를 가려 저녁으로 향하고(景晻愛以向晏)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흐르네(郴之水流以日夜兮)

넘실넘실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波淫泆而不返)

천지는 장구하되(天長地久)

그 한은 이윽고 극에 다다랐구나!(恨其可旣兮)

넋은 지금도 정처 없이 흩어져 떠돌다가(魂至今猶飄蕩)

내 마음이 금석을 뚫어(余之心貫于金石兮)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셨나니(王忽臨乎夢想)

휘도는 자양(후한 말의 진강 사람 채화의 별명)의 노련한 필체인가!(循紫

陽之老筆兮)

생각을 진돈하여 몸가짐을 삼가하고(思螴蜳以欽欽)

술잔을 들어 땅에 붓나니(擧雲罍以酹地兮)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제사의 예를 누리소서(冀英靈之來歆).

「조의제문」은 겉보기엔 의제를 죽인 항우를 비난하며 의제를 조문하는 글인 듯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종을 죽인 세조를 항우에 빗대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이 글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후 나라를 크게 뒤흔들게 된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였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 그리고 도연명의 시 「술주(述酒)」에 대한 김종직의 화답 시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를 넣었다.

1492년 김종직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종은 김종직을 그리워하며 조위와 정석견 등 김종직 제자들에게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라고 명했는데, 김종직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김일손으로서는 그 사실을 반드시 실록에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이 올린 사초 중에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파 이극돈이 성종의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일, 그리고 뇌물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이극돈은 김일손이 올린 사초를 꼼꼼히 들춰봤고, 자신의 비위가 적힌 문서와 함께 김종직의 「조의제문」, 그리고 「화도연명술주」를 발견했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리를 적발하고 사초에 직서한 김일손과 타협하기 위해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를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이라는 것, 그리고 「화도연명술주」가 유유에게 양위하고 죽은 중국 동진(東晉)의 공제를 애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노산군(단종)을 애도하는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사초에서 자신의 비리 사실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의 숨겨진 뜻을 연산군에게 고해바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김일손은 사관의 양심으로 당연히 거부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이미 남이를 모함으로 죽게 만든 적 있는 훈구파의 거물 류자광에게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 문제를 넘겼다.

김종직은 평소 남이를 죽게 만든 간악한 자라며 류자광을 극히 미워했다. 그가 류자광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함양군수에 제수돼 임지에 내려갔는데,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류자광의 시가 현판으로 만들어져 관아에 걸려 있었다.

류자광은 1468년 예종이 즉위했을 때 남이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죽게 만들고 그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김종직은 그런 자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그래서 류자광의 현판을 당장 떼어내고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했다.

때문에 류자광도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몹시 싫어했다.

거기에다 성종조 때 대거 등용된 김종직 제자들 중심의 사학 출신 신진사류는 훈구세력의 막강한 위협세력으로 떠올라 있었다. 신진사류의 활발한 활동으로 훈구세력과 관학파는 크게 위축되었다.

류자광은 신진사류 사학파를 제거하여 훈구세력과 관학파가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를 꼼꼼히 살펴서 계략을 세운 후 그것을 들고 연산군에게 갔다.

두 글이 ‘대역부도의 글’이라고 소개하며 한 줄 한 줄 최대한 김종직에게 불리하게 풀이해서 읽어줬다. 김종직이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 세조를 왕위 찬탈의 역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혈통을 계승한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연산군은 역적의 후예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므로 왕위에서 끌어내려도 반역이 되지 않는 셈이었다.

“종직은 세조조의 은혜를 입어 벼슬을 살고도 왜 자신이 몸담은 조정을 부정했을꼬?”

연산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옛날 세조께서 문신들에게 천문과 풍수 등의 7학(學)을 익히라 전교하신 적 있사온데, 김종직이 이에 크게 반발하며 ‘시사(詩史)는 본래 유자(儒者)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는 잡학인데 어찌 유자들이 힘써 익힐 학문이겠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때 세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제학을 하는 자들이 모두 용렬한 무리인지라 오로지 목표에만 뜻을 두고 과정은 소홀하니 너희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비루한 일일 지라도 나 또한 일찍이 섭렵하며 그 문호에 있었다’고 하시었고, 이어서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시며 이조에 파직하라 전지하셨습니다. 김종직이 그 일에 원망을 품고서 세조께 입은 은혜를 망각하고 대역부도의 죄를 저지른 것 아니겠습니까.”

류자광은 주저 없이 김종직을 헐뜯고 모함했다. 류자광의 풀이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연산군은 격노했고, 김일손, 조위, 정여창, 김굉필 등 수많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래서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는 연산군의 정통성을 훼손한 대역부도의 글이라는 결론을 내고 김종직의 문집을 불태웠고, 시신을 파내 목을 베어 부관참시했다.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중 「무오사화 사적」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7월에 사화가 일어났다. 류자광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대역으로 논죄함으로써 즉시 부관참시하게 했고, 집은 적몰되어 정부인(貞夫人) 문씨(文氏)는 운봉현에 정속되었다. 부인은 즉시 머리를 깎고 복상(服喪)하였다. 귀양 가 있으면서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옹(家翁: 김종직)의 평생의 지조와 절개는 하늘의 태양이 땅을 비추듯 군주가 인민을 두루 살피는 바인데 죽은 뒤에 잘못된 화를 입으니 이 또한 세상의 운이라 생각하고 순종하며 받아들이리”

라고 할 뿐,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았다. 9년 동안 귀양살이하면서 절조를 더욱 힘써 한 번도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했다. 아들 숭년(嵩年)은 이때 나이 13세로 합천군에 안치됐는데,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화를 면했다.

뿐만 아니었다.

김종직의 유언으로 붕당정치를 획책하고 대역부도의 글 「조의제문」을 예찬하여 선왕을 무록(誣錄)했다 하여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을 능지처참했고, 김굉필, 강백진, 강혼, 이계맹 등은 장형과 함께 유배지에서 봉수와 노간(爐干: 관청의 횃불을 관리하는 일)의 노역을 하게 했다.

조위, 정승조는 곽산으로 유배됐고, 표연말, 정여창, 홍한,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장형과 함께 3천리 밖으로 유배했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나고 6년이 지난 후였다.

훈구파가 이미 죽은 사람의 문집을 문제 삼은 것은 그만큼 김종직의 문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김종직을 숭앙하는 사람들이 영남사림의 주류를 이루었고, 수많은 문도들이 관직에 나아가 높이 등용됐다.

공을 내세워 요직을 독점하고 무도한 정치를 일삼아온 공신(功臣)과 척신(戚臣) 중심의 훈구세력으로서는 김종직의 도학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학문적 도덕적 우위를 점한 영남 신진사류를 대할 때마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더욱 미워하고 시기했던 것이다.

학문을 사랑했던 선왕 성종은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매우 아껴주었지만 연산군은 달랐다.

연산군은 모후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됐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선왕 성종을 미워했고, 왕위에 오른 뒤엔 성종이 아끼던 신하들까지도 싫어했다.

김종직은 성종이 가장 아꼈던 신하였다. 그러므로 류자광의 모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 제자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멸살해버렸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구미시청, 고령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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