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임진왜란에서 왜적은 연인원 30만 병력을 동원해 침략했고, 명나라는 연인원 12만 명의 원병을 보내 참전했다.

조선의 군사도 수십만이 동원됐고, 재지사족층이 적극 참여하여 구성된 의병의 참전도 상당했다.

조선의 조정은 개성으로, 평양으로, 그리고 의주로 피난 다녔고, 조정을 둘로 나누어 광해군 분조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고향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왜국의 풍신수길은 1585년 7월 관백에 취임한 후 동아시아 정복을 구상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1587년 대마도주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알린 후 대마도를 전진기지로 삼고 1592년 초 15만 8800여 명의 군사를 3군으로 편성하여 대마도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4월 13일 바다를 건너와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4월 15일 동래성을 함락했다.

왜장 소서행장 휘하의 제1군은 기장-양산-밀양-대구-인동을 지나 상주로 향했고, 가등청정 휘하의 제2군은 양산-언양-경주-영천을 통해 상주로 향했다.

왜장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사마]의 제3군은 후발대로, 김해에 상륙한 후 밀양-영산-현풍-성주-금산-추풍령을 넘어 우로(右路)로 진격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전략적 요충지 상주와 조령에 1차 방어선을 구축하여 왜적을 막으려는 전략을 세웠고, 삼도도순변사(경상·충청·전라의 3도 총사령관)에 신립장군을, 부사에 전략전문가 김여물을 세워서 급히 보냈다.

그리고 경상도순변사 이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로 가서 신립의 군사가 올 때까지 결사항전으로 버틸 것을 명했다. 그러나 왜적의 진격은 너무 빠르고 거침없었다.

조선군이 산성에서 활과 쇠뇌를 쏘며 저항했지만 왜적의 조총 위력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함락됐다.

조총(鳥銃)은 나는 새도 명중시킬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도순변사 이일 또한 상주 북천(北川)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대패했고, 군사를 거두어 신립장군이 오고 있는 충주로 후퇴했다.

1500년대 후반 이황과 정경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고산서당. 1879년 강당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구 수성구 성동 소재. [사진=상주시청]
1500년대 후반 이황과 정경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고산서당. 1879년 강당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구 수성구 성동 소재. [사진=상주시청]

정경세(鄭經世)는 이때 삼년상을 치르던 중이었다. 1590년 6월 부친상을 당했고, 고향 상주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데 경상도순변사 이일이 북천전투에서 대패했으며 왜적이 상주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상복을 입고 나라 지키는 것을 막는 예법은 없다. 충효가 하나(忠孝一身)인 것은 군부일체(君父一體)이기 때문이다.”

정경세가 아우 정흥세에게 말했다.

상중에 참전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나아가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아우 정흥세도 같은 생각이었다.

두 형제는 그 자리에서 의병의 일을 의논했고, 여막을 떠나 의병모집에 나섰다.

한양에서 내려온 충순위 김광폭과 소속 병대가 무너져 갈곳을 잃은 사복 김사종, 그리고 상주지역 선비들이 왜적과 싸우겠다고 몰려들었다. 정경세가 의병장을 맡았다.

정경세는 1563년(명종 18년)에 상주목 묵곡에서 태어났다.

상주는 원래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량벌국)이었는데, 신라 첨해왕 때 신라가 쳐서 없애고 주(州)로 삼았고, 법흥왕 때 상주(上州)로 고쳤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상주(尙州)가 됐다.

상락, 또는 상산이라고도 했다.

『여지도서』에 ‘상주는 동으로 비안(지금의 의성군 비안면)이 있고, 남으로는 선산(지금의 구미)과 김산이 있으며, 서로는 충청도 보은이 있고, 북으로는 함창(지금의 상주시 함창읍)과 경계한다. 한양으로부터 477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정경세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임(景任)이며, 호는 우복(愚伏), 승성자(乘成子), 하거(荷渠), 석중도인(石衆道人) 등이다.

아버지는 정여관이고, 어머니는 이가의 딸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일곱 살에 『사략』을 읽고 여덟 살에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웠는데, 절반만 배우면 나머지는 스스로 깨우쳤다고 한다.

부장(部將) 이해의 딸전의 이씨와 혼인했으나 일찍 사별하고 이황의 숙부인 이우(李堣)의 증손녀이면서 이결의 딸인 진보 이씨와 재혼했다.

1578년(선조 11년)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년(선조 13년) 퇴계의 제자 류성룡이 노모 봉양을 위해 상주목사로 자청해 내려왔을 때 정경세는 이준 이전 형제 등과 함께 류성룡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래서 1582년(선조 15년) 회시에 합격했고, 4년 뒤 알성시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됐다.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할 때 북방 오랑캐들이 명나라에 자주 침범하는 것을 보고 우리 조선도 오랑캐의 불시침략을 당할 수 있으니 이에 대비해 성곽을 보수하고 요새를 구축하며 군량을 모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호국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것이다.

왜적은 조선 침략 후 조선 땅에서 군량미를 조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성을 점령한 후 조선 8도의 병량미 분담계획을 입안한 것을 보면 그것이 증명된다. 함경도에서 207만 1,028석, 평안도에서 179만 4,186석 등 총 891만 6,186석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왜적은 군량미 조달을 위해 점령하는 지역마다 군사를 풀어 노략질을 했다. 상주를 점령한 왜적 또한 노략질을 시작했다.

숨긴 양식을 찾아내기 위해 양민을 마구 학살했고, 백성들이 도망쳐 마을이 텅 비자 피난민을 찾아 안령산으로 향했다.

이에 정경세는 김광폭, 김사종, 정흥세 등과 의병을 나누어 거느리고 왜적이 피난민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서서 싸웠다. 그러나 계속 몰려오는 왜적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경세는 도저히 막을 수 없겠다 판단하고 아우 정흥세로 하여금 일지병을 거느리고 가서 피난민을 대피시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광폭, 김사종과 함께 결사항전했다. 그러던 중 정경세가 적의 화살에 어깨를 맞고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의병장을 잃은 의병은 흩어져버렸고, 왜적은 피난민을 쫓아갔다. 정흥세가 안간힘을 다해 막아보려 했지만 왜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정흥세는 결국 왜적의 칼에 죽었고, 정경세의 어머니도 아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달려가다 왜적의 칼에 목숨을 빼앗겼다. 왜적은 달아나는 피난민을 마구 살해했고, 많은 사람을 잡아서 끌고 갔다.

왜적이 물러간 후 사람들이 와서 시신을 수습했다. 화살에 맞고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큰 부상을 입은 정경세도 그들에게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정경세는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가 끊어지는 슬픔에 크게 통곡했다. 그러나 슬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우 정흥세의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살아남은 의병으로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몸으로 계속 의진을 이끌 수는 없었다.

경상도에서 곽재우, 김면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상주에도 의병에 가담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속속 정경세 의진에 합류했다.

조정, 이홍도, 채유희, 권경호, 이봉 등이 그들이었다. 정경세는 자신의 몸이 의병을 지휘할 수 없음을 들어 다른 사람 누가 의병장을 맡아주었으면 했다. 의병들은 의논 끝에 궁술에 능하고 병법에 능한 이봉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새 의병장 이봉은 함창 황령동으로 진을 옮겼다. 이천두를 중위장으로 삼았고, 김제와 송광국, 조정, 조광수 등으로 의진을 짰다. 부상을 입은 정경세에겐 의병모집과 보급을 책임지는 소모장 임무를 맡겼다.

이봉은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정하고 왜적과 싸웠다.

흩어진 함창관병까지 불러 모아서 합쳤으므로 의진은 제법 규모가 컸다.

소모장 정경세는 뜻 있는 지사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에 참가해줄 것과 군량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변중일이 가산을 팔아서 쌀 100섬을 구입해 보내주었다. 정경세는 또 건의대장 심수경에게 간청해 군량 100석을 얻었다.

그러나 적이 상주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근처에서는 군량을 확보하기 쉽지 않았다. 왜적의 눈을 피해 깊이 숨겨버렸고, 또 왜적에게 이미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정경세는 보은 쪽엔 아직 왜적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그곳도 이미 왜적이 휩쓸고 지나간 뒤여서 군량을 조금밖에 확보할 수 없었다.

한편, 순찰사는 선조임금께, 정경세가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싸우다가 어머니와 아우를 잃고 정경세 자신도 유시(流矢)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전황장계를 올렸다.

임금은 정경세를 기특히 여기고 예조좌랑에 임명하고 불렀다.

그러나 정경세는 전쟁으로 길이 막혀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상중임을 들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이 왔다. 의병군량을 구하기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군량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보릿고개가 오기도 전에 의병들이 굶주리게 될지도 몰랐다. 정경세는 의병도 더욱 모으고 군량도 확보하기 위해 아직 왜적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공주까지 가서 그만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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