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928년 가을의 어느 날 오후 한 시경,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김유정은 수운동 목욕탕 골목에서 어떤 한 여인을 발견하고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조그만 손대야를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여인이었는데,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병자처럼 수척한 몸이었다.

목욕탕을 나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수심 가득 찬 눈으로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보고 찬찬히 걸었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를 의식한 듯 특유의 슬픈 눈빛으로 잠깐 돌아보았지만 무심결에 흘려버리고 다시 발 앞의 땅으로 시선을 돌린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김유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 둘은 이미 구면이었다. 다만 그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소설가 김유정에게 혈서까지 받고도

김유정은 그녀를 불러 세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보조를 맞춰서 천천히 그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마냥 그렇게 걷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의 동행은 길지 않았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김유정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팔도명창대회에서였다. 스물다섯 살의 그녀는 그 명창대회에 출연하여 『춘향가』를 열창했다.

‘너는 죽어서 이백동호 삼춘으(삼춘의)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범나부(범나비) 되어 네 꽃송이를 담북 물고 너을너을 놀거들랑은 날인 줄로만 알려무나….’

박록주의 깊은 우물 같은 눈동자가 객석을 훑고 지나갔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하며 객석을 흐르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한 곳에 닿아 멈칫했다.

그녀의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한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스물두 살의 문학청년 김유정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잠시 흔들리는 듯했고,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내 사랑이로다, 둥둥둥 내 사랑…’ 하고 흥겹게 흘렀다. 멈추었던 그녀의 눈동자도 노랫가락 따라 다시 흘렀다.

젊은 시절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젊은 시절의 박록주. [사진=구미시청]

박록주는 1922년 서울로 올라가 국창 송만갑에게서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고 이듬해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송만갑은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김창룡과 함께 5명창으로 불린다.

팔도명창대회에서 박록주의 소리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훔치거나 벌떡 일어나 환호를 지르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앙코르를 원하는 관객이 너무 많아서 그녀는 몇 번이나 거듭해서 응한 후에야 겨우 공연을 마칠 수 있었고, 하얀 저고리에 손을 얹고 객석을 향해 인사한 후 하얀 치마를 움켜쥔 채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 김유정은 황급히 몸을 돌려 객석을 빠져나갔다.

김유정은 무대 뒤 대기실로 달려갔고, 몹시 지친 모습으로 어떤 노신사와 대화 중인 박록주를 발견했다.

“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김유정이 쭈뼛쭈뼛 박록주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저, 그게….”

김유정은 노신사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미안한데,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봐요. 지금은 이분과 얘기 중이라서요.”

박록주는 공연 때마다 만나자고 조르는 남자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그런 청년이려니 생각하면서 말했다.

“아, 예. 그럼 극장 앞에서 기다릴게요.”

“어쩌죠?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

박록주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 후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잘 가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그날 만난 노신사는 김경중 영감이었다.

김경중은 당시 물산장려운동과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동아일보사 사장 김성수의 아버지였다.

김성수는 후에 민주국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최고위원을 역임하며, 1951년 5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되는 인물이었다.

김경중은 그날 이후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 물심양면 큰 도움을 주었다.

국창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면서 3천 원을 들여 수운동에 있는 한옥을 사서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김유정은 극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멀쑥한 남자와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천 출신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 씨였다. 김유정은 뛰어가서 대기 중인 인력거에 오르려던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얘기 나눌 수 없을까요?”

김유정이 말했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어렵겠다고 하며 고개를 저었고, 인력거에 올라앉아 휘장을 내렸다.

김유정은 실망스런 표정으로 멀어지는 인력거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태운 인력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극장으로 돌아갔고, 관계자들에게 물어서 그녀 집주소를 알아냈다.

조선극장에서 처음 선생님이 소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의 고향은 춘천이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제 위로 형님과 누님이 있는데, 누님이 봉익동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누님 집에서 숙식하며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는 스물두 살 학생입니다. (…) 당신을 연모합니다.

김유정은 이튿날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박록주는 처음 그 편지를 받고 잘못 배달된 편지인 줄 알고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똑같은 이름의 화초기생 박록주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녀에게 갈 편지가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편지가 다시 배달됐다.

이번에는 봉투 속에 그녀 사진도 동봉돼 있었다. 그녀의 판소리 취입 레코드에 인쇄된 사진을 오린 것이었는데, 그녀에게 보낸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날부터 매일 한 통씩 김유정의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다 말겠지, 하고 생각하여 답장을 하지 않았다.

박록주의 답장이 없자 김유정은 주소지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밤이 오고 통금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하고 싶은 말을 적어온 편지를 그녀의 집 대문 틈에 끼워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김유정은 이튿날도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대문을 나선 그녀는 먼 하늘을 한 번 쳐다본 후 고개 숙여 땅바닥에 눈길을 두고 천천히 걸어서 어딘가로 향했다. 창백한 얼굴과 수심 가득한 그 눈빛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그는 저만치 떨어진 채 묵묵히 그녀를 따라 걸었다.

김유정은 자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음을 편지로 전했다. “목욕을 한 당신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웠소”라는 말도 있었고, “당신이 밤길을 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소. 당신을 연모하오. 저를 사랑해주시오”라는 말도 있었다. 물론 그녀를 기다리다가 허탕 치고 돌아간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혼자 술을 마시며 그녀를 생각했다.

나는 술로 밤을 새운다. 술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지금쯤 너는 어느 요정에 가서 소리를 하고 있겠지. 이 추운 밤에 홀로 술을 드는 나를 생각해보라. 사랑이란 것은 억지로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뭣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너를 생각한다.

-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 1. 25) 중에서

‘선생’이던 호칭이 이젠 ‘너’로 바뀌어 있었다.

김유정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박록주는 그날부터 혼자 걸어 다니지 않았고, 인력거 휘장도 내리고 다녔다.

그러자 그는 편지로 만나달라고 요청했다. 몇 달 동안 편지를 썼지만 그녀로부터 단 한 장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만나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은 감정이 격해져서 화풀이식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어느 날은 혈서를 써서 그녀의 집 담장 너머로 던져넣기도 했다.

너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밤새도록 고려관 앞에서 너를 기다렸다. 네가 나오면 죽이려고 네 그림자를 찾아도 너를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나를 만나주지 않을 때는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 「록주, 나 너를 사랑한다」『( 문학사상』 1973년 4월호)

사생팬 김유정의 섬뜩한 협박에 박록주는 겁을 먹고 더욱 숨어서 다녀야 했다.

“언니,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예요? 만나서 알아듣게 설득을 해요.”

명창 이동백의 양딸이자 박록주의 친한 후배인 원채옥이 말했다. 원채옥은 김유정과 나이가 같았다.

그러나 박록주는 김유정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고개를 저었다. 사랑을 목숨 걸고 하는 열혈청년이었기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원채옥은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박록주가 오히려 부러웠고, 그 청년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함께 있어줄 테니 한 번 만나보라고 부추겼다. 박록주는 들은 척도 않았지만,

“언니, 그러다가 그 학생이 진짜 죽어버리면 어떡해요?”

원채옥은 사람 한 번 살리는 셈 치고 만나보자고 졸랐다.

“그래, 가엾긴 하다. 한 번 만나나 보자.”

박록주는 함께 있어주겠다는 원채옥의 말에 용기를 얻어 어렵게 결심하고 일하는 할머니를 시켜서 김유정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넣었다. 김유정은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씨, 그 학생이 왔어요.”

문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보자고 조르던 원채옥은 김유정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후닥닥 다락으로 올라가 숨어버렸다.

난감해진 박록주는 잠시 허둥거리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고, 태연한 척 장침을 괴고서는 들여보내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연희전문학교 교복을 입은 청년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뚝한 콧날에 예리한 눈빛, 앙다문 입술에서 강한 고집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방석을 밀어서 앉을 것을 권했다.

“학생이 김유정인가요?”

그녀는 일부러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제가 바로 하루도 쉬지 않고 선생님께 편지를 보낸 김유정입니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편지질이요?”

“편지하는 게 잘못입니까?”

“학생이 기생과 연애를 하자고 하니 하는 말 아니오.”

박록주는 김유정의 당돌함에 내심 놀라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학생은 기생과 연애하면 안 된다는 법이 몇 조 몇 항에 있습니까?”

김유정이 말했는데, 박록주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참 후, “학생이면 공부나 잘하지 않고 연모가 다 뭐요”

하고 멋쩍게 말했다.

“연모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사랑 없이는 나는 살 수 없습니다.”

김유정은 자신의 절절한 애모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자기에게도 마음 줄 것을 애원했다.

“나는 한낱 기생일 뿐이고, 그쪽은 대학생이오. 설사 내가 그쪽 마음을 받아준다고 한들, 학생의 창창한 앞날을 막았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냔 말이오. 그쪽이 하고 있는 연모는 나를 위한 길이 아니고, 학생 혼자만의 이기심이오.”

박록주는 자신이 이미 결혼을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김유정을 타일렀다. 그녀는 192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했다가 원산지역의 유지였던 남백우(南百祐) 눈에 띄었다.

남백우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신민회 소속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단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중국 베이징과 난징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부모님이 위독하여 1916년 귀국했다.

원산무역주식회사 이사, 북선창고주식회사 지배인, 주식회사 흥업사 감사역 등을 역임했다. 그는 박록주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가 됐으며, 열아홉 살 아래인 그녀를 소실로 맞아들였다.

“이미 혼인을 했어도 소실 아닙니까. 그 남자를 버리고 내게 오면 그만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것은 앞날 창창한 한 학생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지 결코 욕먹을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눈치 보느라 사랑을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습니까.”

김유정은 절대로 박록주를 포기할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학생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소. 그것은 내게 이미 마음에 둔 남자가 있기 때문이오.”

박록주는 남백우와 헤어질 생각으로 교제 중인 남자가 있다는 사실도 말했다.

순간 김유정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김유정은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사동 조선극장 지배인인 신모 씨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을 말하면 김유정이 신 씨를 찾아가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자주 요릿집 천향원으로 불러내는 신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만날수록 정이 샘솟았고, 힘들 때마다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날, 박록주는 김유정에게 화도 내고 달래도 보다가 도저히 당할 수 없어 내쫓다시피 보냈다. 그렇지만 김유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편지를 보내고 그녀를 미행했다. 그녀가 피할수록 김유정의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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