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65년, 마흔 살이 된 정탁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 헌납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조정은 임금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서로 대립하여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관리

중종 후반부터 조정의 정파는 세자(훗날 인종)의 외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훗날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으로 나누어졌다. 두 세력의 대립은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 쪽으로 힘이 기울어졌다. 권력을 거머쥔 대윤은 가장 강력한 정권 위협세력인 소윤을 탄압했다. 소윤의 대표 격인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여 대윤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명종이 즉위한 때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윤원형은 20년 동안 권력과 재력을 마음껏 누렸다. 윤원형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가 휘두른 권력은 임금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 명종실록(明宗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명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서 자유롭지 못했다. 윤원형은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해서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니, 주상의 걱정과 분노가 말과 얼굴에 나타났다. 내관 중에서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宮人)을 후하게 대접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에 주상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었다.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고 물었는데, 이는 윤원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새어나가서 문정왕후에게 들어갔다. 왕후가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께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크게 꾸짖자, 주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라의 모든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오니 주상은 마음속으로 그를 무척 미워했다.”(명종 20년 11월 18일)

윤원형은 재산도 엄청나게 축적했다. 『명종실록』에는 “뇌물이 집안에 넘쳐났으며 재산은 국고(國庫)보다 더 많았다”고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윤원형의 애첩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정경부인에 오른 정난정의 탐욕도 대단했다. 정난정은 남편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서 막대한 부를 끌어 모았다.

안하무인의 권세를 자랑하던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급격하게 몰락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대신들은 윤원형을 강력하게 탄핵했다. 그렇잖아도 윤원형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명종은 즉시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던 중 정난정이 윤원형의 부인 김씨를 독살했다는 게 밝혀져서 사사될 운명에 처하자 윤원형과 정난정은 함께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정탁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윤원형 일파의 죄를 과감하게 직언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여 언관의 직무를 다했던 정탁의 태도에 많은 대신들이 존경심을 표했다.

1568년(선조 2년), 정탁은 춘추관 기주관으로 있으면서 『 명종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지평과 이조좌랑을 거쳐서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1581년(선조 14년), 정탁은 대사헌으로 임명되었으나 장령 정인홍 및 지평 박광옥 등과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하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여 이조참판으로 옮겨갔다. 1582년 겨울, 명나라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88년(선조 21년) 봄, 형조판서에 임명된 정탁은 이듬해 1월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어느새 예순네 살의 나이가 된 정탁은 고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그를 신임한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8월 병조판서를 거쳐 11월에 좌참찬으로 임명된 정탁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를 방문했다.

정탁이 명나라 사은사로 임명될 무렵, 일본으로 파견될 조선통신사도 꾸려졌다. 정탁은 1589년 12월에 명나라로 떠났고,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은 1590년 봄에 일본으로 떠났다.

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왜적이 쳐들어오다

1592년 4월, 일본이 기습적으로 조선을 침략해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불과 열흘 만에 서울의 턱밑까지 밀어닥쳤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선조가 서울을 떠나 피신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미 많은 대신들이 피신하여 임금을 호종하는 대신들은 평소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일흔에 가까운 나이의 정탁이 선조의 호종 행렬을 이끌었다.

여러 대신들은 선조를 서울에서 먼 함경도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탁은 평안도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우왕좌왕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의 군사력은 왜적에 비해 열세였다.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도움이 절실했다. 명나라의 도움을 얻으려면 지리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운 평안도로 가야 유리했다. 결국 몇 수 앞을 내다본 정탁의 의견대로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다.

5월 2일,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에 왜적은 서울을 점령했다. 전라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강이남 지역이 왜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서울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약탈하고, 노비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의 소송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선조가 개성을 지날 때는 왜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피신하는 것에 분노한 백성들이 임금의 행렬에 돌을 던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6월 14일, 서울을 점령한 왜적이 평양을 향해 치고 올라오자 다시 영변으로 피신한 선조는 그곳에서 분조(分朝)를 결정했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조정을 둘로 나누기로 하고 임금이 있는 곳을 ‘원조정(元朝廷)’,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라고 했다. 분조는 최악의 경우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을 대비하여 임금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른바 소조정(小朝廷)이었다.

분조가 결정되자 류성룡 등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 방면으로 향하고 정탁 등은 세자를 모시고 강계 방면으로 향했다. 선조가 계속 북쪽으로 피신을 하자 명나라로 망명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정탁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사진=안동시청, 예천군청]

류성룡은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명나라 망명을 극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류성룡의 상소로 선조가 명나라로 피신하는 문제는 없던 일이 되었다. 한편, 정탁은 세자(훗날 광해군)와 함께 종묘사직을 이끌고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다니면서 정세를 살폈다. 열심히 활동하는 의병장들에게는 상을 내려서 격려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에는 인재를 발탁해서 고을을 지키는 책임을 맡겼다.

선조는 명나라에 급히 사신을 보내서 구원병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가 아니라 국경을 지키는 부대였다.

1592년(선조 25년) 7월 15일, 조승훈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 야밤을 틈타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왜적의 기습을 받아서 대패하고 명나라로 물러가고 말았다.

1차 구원병 파견이 실패로 끝나자 명나라 조정은 왜적과 화의를 맺을 것인지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을 벌인 끝에 다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2월, 간쑤성(甘肅省)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2차 구원병이 조선으로 향했다.

4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넌 이여송(李如松)은 1593년(선조 26년) 1월, 평양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전열을 정비한 조선 관군과 휴정(서산대사)이 이끄는 수천 명의 의승군과 합세하여 1월 28일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맹렬하게 공격해오자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기세에 눌려서 성에 불을 지른 뒤 대동강 너머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은 모란봉 전투에서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서 평양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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