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일과 3일 남부지방산림청(청장:조병철)과 사회적협동조합 모천이 함께 주관한 ‘산불 피해 현장 답사’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시인 이하석, 송재학, 송찬호, 안도현, 안상학, 장석남, 손택수, 김성규와 소설가 황현진, 이주란 등이 참가했다.

본지 하응백 문화에디터도 동참했다.

2회 원고로 소설가 황현진의 원고를 게재한다.

황현진은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두 번 사는 사람들』, 『호재』, 작품집으로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이 있다./편집자주

산불 진화 현장. [사진=산림청 제공]
산불 진화 현장. [사진=산림청 제공]

【뉴스퀘스트=황현진 소설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2년을 보냈다.

재난의 시대를 겪는 동안 우리 사회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졌으며 불행히도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전염에 대한 강력한 공포였다.

고립의 날들을 보내면서 서로 간의 거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전염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는 그 당연한 진실은, 가장 슬픈 방식으로 우리가 혈관처럼 서로서로 이어져 있음을 일깨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죽음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공포, 다름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불안이야말로 재난의 어두운 심연이었다.

그것은 모두를 가두는 심연이어서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전쟁 이후, 죽음이 이토록 우리 가까이에 있던 적은 없었다.

코로나는 보이지 않는 불길과도 같았다.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대형 화재로 번지듯이 신종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피해를 키워나갔다. 우리는 화재 속에 남겨진 이재민들처럼 속수무책으로 번져 나가는 불길을 저지하고자 스스로 멀어졌다.

들숨과 날숨이 생과 사를 가르는 도화선 같았다. 모든 순간순간이 위태로워서 우리는 무심결에 내뱉는 숨결조차 가리느라 급급했다. 어디까지나 비유이지만, 마스크를 쓴 얼굴로 보낸 지난 2년은 화재 시 대피 요령을 배웠던 어느 날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도 했다.

산불 진화 현장. [사진=산림청 제공]
산불 진화 현장. [사진=산림청 제공]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의 야산, 그곳은 재난 이후의 세계였다.

2021년 2월 21일에 발생한 산불은 순식간에 마른 나무들과 쌓인 낙엽들을 태우며 화염을 키웠다.

설상가상 늦겨울의 강한 바람을 타고 화마는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불씨는 대략 307㏊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난해, 축구장 434개 넓이의 산림을 태운 안동산불이 진화된 지 겨우 8개월 남짓 지난 후였다.

지난 산불로 입은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다시 화마가 닥친 탓에 상처는 깊었다.

최근 2년, 안동에는 크고 작은 산불들이 연이었다.

들불이 산으로 옮겨붙거나 화목 보일러의 불씨가 발화의 원인인 경우도 적지 않다.

최초 발화지가 깊은 산 속이다 보니 화재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져있는 경우도 많다.

안동시는 서울시보다 면적이 넓고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산불 발생이 쉽고 진화하는 데도 애를 먹는다.

오죽하면 안동에서 산림공무원을 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겠는가.

해를 거듭해 일어난 대형 산불로 안동은 축구장 2700여 곳과 맞먹는 산림을 잃었다.

원인 대부분은 입산자의 실화로 추정된다. 하지만 화재의 책임이 있는 실화자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에는 CCTV가 없어서 설령 용의자를 추려낸다고 하더라도 물증을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방화가 아닌 실화이다 보니 대부분이 초범이거나 고령의 노인, 혹은 영세한 농민인 경우가 많다.

사실상 처벌 수위를 높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산불은 대형 인재(人災)다.

순간의 방심이 산을 태우고 나무를 죽인다. 바람이 불길을 키우는 숨이 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기름이 된다.

이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자라는 세계가 고작 몇 시간에 무덤이 된다. 땅속에 굴을 파고 생을 이어가는 작은 짐승들과 꿀과 수액을 먹고 자라는 새들과 곤충들에게 산불은 전 세계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화마가 휩쓸고 검은 산은 잿더미다.

숨을 쉴 수가 없고, 맨발을 디딜 수가 없다. 불길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검은 잿더미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 참혹한 광경은 결국 모든 재난에 대한 경고이자 예보이다.

산림청 헬기 항공구조훈련. [사진=산림청 제공]
산림청 헬기 항공구조훈련. [사진=산림청 제공]

산은 고요하고 적막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동물과 식물 들이 터전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묻힌 땅이기도 하다.

인재로 인한 산불은 결국 모든 존재의 삶과 죽음에 모욕을 가하는 일이다.

그뿐인가. 산불 진화에 투입된 산림청의 산불재해 특수진화대원에게는 목숨을 거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한 차례 재난이 일으키는 재앙은 이토록 연쇄적이고 다발적이다.

산불 예방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최근 안동시는 2023년까지 200억을 웃도는 예산을 들여 산불 피해지 복구 조림사업을 추진하기로 밝혔다.

허허벌판으로 변한 산림에 나무를 심는 일에도 그만한 인력이 필요하다. 땅을 고르고 나무를 심고 지주목을 세우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력과 예산을 들여 지속적인 산림복구에 나서지만,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숨탄것’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우리 조상은 ‘숨탄것’이라 불렀다.

‘타다’라는 단어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이 경우의 ‘타다’는 선천적으로 나고 지닌 것을 뜻한다. 숨을 타고 난 것, 즉 생명을 타고 난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깊은 존중이 담긴 말이다.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의 야산에서 검게 탄 나무껍질을 뚫고 나온 푸른 싹을 보았을 때, 나는 잊고 있던 숨탄것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불에 탄 나무 대부분은 회생할 수 없지만, 그 검은 죽음의 세계에서 ‘숨탄것’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생을 나고 지닌 빛이었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