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지양하고 기술기업으로 변신.
올해 공룡포털 네이버 대표 연임 성공
몸집만큼 커진 '반 네이버정서' 어떻게 풀지 주목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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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김선태 기자】 "앞으로 네이버를 이끌 한성숙 총괄 부사장을 소개합니다." 

김상헌 네이버 전 대표의 말에 장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지난 2016년 11월22일 오후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네이버커넥트 2017' 행사에서 마치 신데렐라처럼 등장했다.

시가총액 27조원, 코스피 순위 6위에 달하는 공룡 기업을 이끌 최초의 여성 전문경영인으로 공식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IT(정보기술) 대기업들이 관례처럼 외부 인사를 대표로 영입했기에 그날 발표의 파장은 컸다.

소개를 받은 뒤 한 부사장도 예상 못했다는 듯 "정신이 혼미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사장 선임 발표에 '정신이 혼미했다'고 말한 것은 그냥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한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기술과 사용자를 연결하겠다"며 네이버가 포털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기술기업으로의 변화를 예고했다.

한 대표는 이어 네이버를 이끌 차세대 키워드로 '개인이 성공을 꽃 피우는 기술 플랫폼'을 제시하기도 했다.

네이버는 이를 위해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들을 베타 테트스 형태로 서비스에 접목하는 실험을 진행중이다.

네이버의 이같은 변화는 이미 몇년전부터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이기도 했다.

한대표 취임 이전부터 네이버 내부에서는 '과연 포털 플랫폼으로서 네이버가 몇년이냐 더 갈것인가?'라는 회의론이 조직을 감싸고 있었다.

한 대표는 네이버의 성격 변화와 개조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인공지능 전문가 부사장을 영입하는 등 기존 플랫폼 네이버를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기술기업으로의 과감한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아울러 인력구성 면에서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뉴스제휴 분야 인력은 점차 줄이면서 기술기업으로의 변신을 위해 관련 인재들 영입에 적극 나선 것이다.

네이버의 그간 경과를 잘 아는 이들은 한 부사장의 대표 임명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입을 모았다.

◇ 초창기 네이버 성장의 숨은 주역

네이버는 1997년 삼성SDS의 사내 벤처로 출발했다.

회사가 후원한 한계도전 프로그램에 서울대 전자공학과 86학번 이해진이 참여해 국산형 검색엔진 개발에 나선 것이다.

당시 세계적인 벤처 붐을 타고 라이코스, 구글, 야후 등 월드와이드웹 검색 포털이 한창 인기를 얻던 때였는데 이해진은 거기에서 사업 기회를 찾았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었는데 1995년 출발한 다음커뮤니케이션(다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두주자였다. 

다음은 하이텔, 천리안 등이 이끌던 PC통신 시대에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하는 포털 커뮤니티를 선보여 단숨에 인터넷 선도기업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엠파스가 '열린 검색' 서비스를 시작했으니 2년 뒤 네이버의 출발은 다소 늦은 셈이다.

1999년 6월 이해진은 독립해 네이버컴을 설립했고 이어 100억원 가량의 투자까지 끌어들이며 포털 경쟁에 가세했다.

하지만 초기 네이버의 전망이 밝지 않았다. 검색 서비스에 치우쳐 제대로 된 수익모델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 벤처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네이버 변대규 이사회 의장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1989년 휴맥스를 설립했는데 처음 5년 동안에는 해마다 1~2개 사업 아이템을 개발하다 접었다. 그러다 가요반주기를 만들었는데 개발자들은 무시했던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리는 기능에 시장이 반응해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이다 싶으면 무조건 내놓고 봤는데, 정작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는 설명이다.

주로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졌고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네이버의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중 2000년 7월 이 전 의장은 서울공대 동기인 김범수 대표의 한게임과 네이버의 합병을 성사시킨다.

'검색으로 미래를 삼고, 게임으로 현재를 버틴다'는 전략은 주효했다. 

합병 전 6000만원이던 적자가 2001년 순이익 100억원으로 전환된 것이다.

2003년 네이버는 다음의 매출을 뛰어 넘었고 이후 지금까지 포털 시장에서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국내 주요 포털서비스 기업 매출 추이(2001-2006). [출처 = 금융감독원전자공시시스템(dart.fss.or.kr)]
국내 주요 포털서비스 기업 매출 추이(2001-2006). [자료=금융감독원전자공시시스템]

네이버는 그 무렵 야후의 디렉터리 검색에 대응해 자연어 검색을 선보이면서 검색포털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다.

네이버는 검색서비스로 사용자를 붙잡은 뒤 사용자들끼리 능동적으로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 '지식iN'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접속량이 폭증했다.

반면 선발 주자였던 다음은 여전히 커뮤니티 서비스에 치우쳤고 엠파스는 2003년 매출이 260억원에 불과해 매출 1663억원인 네이버와는 비교되기 어려웠다.

그 무렵 한성숙 대표는 엠파스에서 활동했다.

한 대표는 1989년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한 문과생이다. 

그는 1989년 잡지사인 민컴에 입사해 IT업계 담당기자로 활동하다 1994년 나눔기술로 옮겨 홍보팀장을 맡은 뒤 다시 1996년 PC라인 기자로 일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컴퓨터 산업 분야를 취재하면서 업계의 상황을 가까이서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이 다음 그라운드의 발판이 돼준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 대표는 "어 그런 게 있대, 그런 걸 한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일했다"는 것이다.

문과 출신이라 개발자들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밤낮으로 컴퓨터 용어나 신기술과 씨름했는데 타고난 악바리 근성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이후 1997년 2월 엠파스에 입사해 검색사업본부장을 맡으면서 다양한 검색 서비스 발굴에 관여했다.

자연어검색 개발 과정을 지켜봤고, 지식공유 커뮤니티나 도서정보 검색, 지역정보 검색 나아가 검색 개인화 기능을 서비스로 구현하는데 참가했다.

초기 포털 업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제공했던 대부분의 서비스를 경험한 셈이다.

그럼에도 엠파스는 2006년 10월 SK커뮤니케이션즈에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한 대표는 매각에 반대하다 3개월 뒤 사표를 던졌다.

앞서 엠파스와 일하다 네이버(당시 NHN)에서 일하던 이준호 박사가 이해진 전 의장에게 그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에 2007년 5월 한성숙은 네이버 검색품질센터 이사로 일하게 된다.

한 이사가 먼저 맡은 일 중 하나는 '사전 콘텐츠 확장'이었다.

당시는 검색 원천이 될 국내 웹사이트의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해 네이버로 검색하면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는 답이 흔히 돌아왔다.

두산백과 표제어 20만개로 그와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는 주위의 선입견을 깨고 온라인상에서 표제어를 과감하게 늘렸다.

지금 네이버 두산백과의 표제어는 수백만 개를 헤아린다.

모자라는 표제어는 출판사와 제휴하여 얻어냈다.

다행히 네이버는 2004년 한국출판인회의가 설립한 전자책업체 북토피아에 투자하며 도서본문 검색서비스를 시작한 배경이 있어 작업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얼마 안가 네이버는 독보적인 검색품질을 자랑한다.

점차 한 대표는 네이버의 서비스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네이버 한성숙 대표[사진 = 네이버 제공]
한성숙 네이버 대표. [사진=네이버]

◇ 모바일 대응 늦어지고 언론과 마찰 늘어

2003년 이래 포털 시장의 1인자로 올라선 네이버지만 앞길이 계속 탄탄대로 만은 아니었다.

공교롭게 2007년 한성숙 이사가 네이버로 옮긴 직후 김범수 대표가 회사를 떠났다.

그해 11월 네이버는 네이버재팬을 재설립하면서 일본시장 문을 두드렸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연초 스티브 잡스의 미국 애플사가 내놓은 아이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는데, 네이버는 여기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대신 네이버는 검색포털의 위상을 꾸준히 강화해갔다.

그동안 뉴스검색 기능을 꾸준히 향상시키던 회사는 2009년 '뉴스캐스트'를 오픈하면서 뉴스포털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한성숙 대표의 검색품질센터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10년 국내 모바일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김범수 전 대표가 내놓은 카카오톡이 단기간에 국민 메신저로 떠오르면서 모바일 시장을 장악했던 것.

네이버는 이에 대응해 부랴부랴 네이버톡을 내놓았으나 시장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이버는 2011년 일본 동일본 대지진 이후 현지에서 급히 개발한 모바일 메신저 '라인' 덕에 되레 해외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이후 네이버 경영 전략에 다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해진 의장은 라인을 중심으로 해외시장에 주력하고 기존 경영진들은 국내시장에 주력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라인은 출시 1년7개월만에 전 세계 1억명의 가입자를 확보했고, 이에 2012년 6월 네이버-라인 분리가 이루어진다.

이후 한성숙 대표는 검색품질센터 대신 'NHN 네이버서비스1본부장'으로서 네이버 서비스를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라인은 2016년 7월 14~15일 양일에 걸쳐 뉴욕과 도쿄에서 동시에 기업공개를 단행해 1조5000억원을 조달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한편, 국내에서는 뉴스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검색포털의 역할이 더욱 커졌는데 그것이 네이버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일이 2006년에 도입한 아웃링크 서비스였다.

아웃링크란 사용자가 네이버에서 뉴스를 검색한 뒤 결과 목록에서 제목을 선택하면 해당 언론사 사이트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로, 포털과 언론사의 상생 모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뉴스가 네이버 한 군데서 검색되다보니 다수 언론사들이 접속률을 높이고자 검색어에 기사를 꿰어 맞추는 이른바 '어뷰징' 기사가 판을 치게 되었다.

또 포털에 대한 언론사의 의존이 심화되면서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네이버는 2009년 뉴스케스트, 2013년 뉴스스탠드를 도입해 외형상 언론사의 편집 영역을 넓혔지만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네이버 차기 대표로 소개받는 한성숙 내정자2016년 11월 22일 한성숙(왼쪽) 네이버 신임 대표 내정자가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연례 ‘네이버 커넥트 2017’ 연단에 올라 인사하고 있다. 뒤로 김상헌 당시 대표가 인사하며 물러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네이버 차기 대표로 소개받는 한성숙 내정자
2016년 11월 22일 한성숙(왼쪽) 네이버 신임 대표 내정자가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연례 ‘네이버 커넥트 2017’ 연단에 올라 인사하고 있다. 뒤로 김상헌 당시 대표가 인사하며 물러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기술과 서비스 연결에 독보적"

그 사이 네이버의 주 매출원인 광고 시장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주 무대가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제일기획에 따르면 국내 온라인 광고 시장 규모는 2013년 PC부문이 모바일 부문에 비해 81대 19로 압도적으로 컸다.

그러다 2014년 69대31, 2015년 57대43으로 좁혀지더니 2016년 48대53로 역전됐고, 이후 격차가 해마다 벌어지는 추세다.

네이버는 2006년 매출 5000억원을 넘어선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2008년 창업 10년만에 1조원 고지에 올랐고 2011년에 2조원대, 2015년 3조원대, 2016년 다시 4조원대를 달성했다. 

하지만 시장 구조의 변화는 네이버에게도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모바일 시장에는 카카오가 자리 잡은 데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가진 구글까지 가세하고 있어 네이버도 여기서는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이해진 전 의장이 2014년 6월 25일 한 강연에서 "모바일에서 네이버는 아무것도 아니다.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로 우려를 표현할 정도였다.

경영 측면에서 기존 체제를 넘어선 확실한 대안이 필요했다.

정리하자면 해외, 개발, 기술 부문과 국내, 기획, 콘텐츠 부문의 역할분담을 통한 시너지를 지향하는 가운데 PC 시대의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모바일 시대를 개척할 필요가 대두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네이버 경영진들과 이해진 전 의장의 조언자들 다수가 지목한 인물이 바로 한성숙 대표였다.

스타급 인물을 고르라면 네이버에도 출중한 인물이 많았다.

라인 성공의 주역인 신중호 대표, 증강현실 기반 앱 스노우(SNOW) 개발자 김창욱 대표 등이다. 

그럼에도 약 10년에 걸쳐 '기술과 서비스의 접목'을 주도하며, 다양한 제품군을 발굴해온 한 대표의 공헌은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스마트폰 앱을 사용자 친화적으로 꾸미는 등 네이버의 '모바일 시프트'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2017년 한성숙 대표 체제가 확립된 뒤 네이버는 3년 내내 큰 폭 성장세를 유지한다.

매출은 그해 4조6785억원, 2018년 5조5869억원에 이어 지난해 6조원을 돌파했다.

2019년 말에는 시총 30조원을 넘나들며 코스피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5월 24일 현재 시총은 37조8627억원으로 4위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는 지난해 9월 말 기준 국내 200대 상장사(매출액 기준)의 등기임원 1444명을 전수조사한 결과, 여성 대표이사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 한성숙 네이버 사장 등 3명뿐이었다.

이 가운데 오너 일가인 두 사람을 제외하면 한성숙 대표는 국내 200대 상장사 중 유일한 여성 전문경영인에 해당한다. 

2019년도 하반기 국감 최대 화두 ‘네이버 실검’한성숙 네이버 대표(오른쪽)와 여민수 카카오 공동대표가 2019년 10월 2일 오후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2019년도 하반기 국감 최대 화두 ‘네이버 실검’
한성숙 네이버 대표(오른쪽)와 여민수 카카오 공동대표가 2019년 10월 2일 오후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 당면 과제는 '반(反) 네이버 정서'

네이버가 이처럼 거대한 규모로 성장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커지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네이버 검색을 접하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반(反) 네이버 정서'를 들 수 있다.

정권과 결탁해 여론을 조작한 정황이나, 뉴스 배치 등의 문제로 여러 의혹의 중심에 선 것이다.  

실제 지난 2016년 12월25일,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로 촛불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였다.

"네이버와 다음 등이 정부 당국이 요청할 경우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실검)' 순위에서 특정 키워드를 삭제·제외할 수 있는 지침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즉 "네이버가 자체 판단과 이용자 신고 등을 이유로 하루에 수천 건에 이르는 자동완성·연관 검색어를 제외했다"는 것이다.

네이버는 실제로는 이를 실행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는데, 그럼에도 이로 인해 '포털이 주도한 인터넷 여론 검열'이 도마에 올랐다.

2017년 10월에는 네이버의 뉴스 배치 조작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연맹 비판 기사를 뉴스 수용자가 잘 볼 수 없는 곳에 재배치해달라"고 한 청탁을 네이버가 수용했다는 것이다.

한 대표가 네이버 스포츠 담당자의 일탈 행위임을 밝히며 사과했고, 이해진 전 의장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해 여야 의원들에게 집중 질타를 받았다.

2018년 초에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네이버 댓글 추천 수를 조작한 드루킹 사태가 터졌다. 

이에 네이버는 "자체 뉴스편집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는 모바일 첫 화면에서 '이용자들이 구독한 언론사 채널을 노출하는 조치'로 이어졌다.

네이버는 초창기부터 언론 검색을 주도하며 이를 성장 발판으로 삼았다.

한성숙 대표는 2007년 네이버 합류 초기부터 검색본부를 맡았고 이후 검색 서비스를 총괄함으로써 이 문제의 중심에 서 왔다는 평을 받는다.

사실 언론 포털로서 네이버가 겪어 온 숱한 문제를 그만큼 깊숙이 관계했고, 정확히 꿰고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2020년 3월 27일 주주총회에서 네이버는 한 대표에게 향후 3년의 지휘봉을 다시 맡겼다.

이 자리에서 한 대표는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적 역할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언론포털로 인식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따가운 눈총 앞에서 네이버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 대표가 향후 풀어야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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