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면 팽나무, 팽나무 한다.나를 '팽나무 박사' 또는 '팽박'하고 부르거나 아예 나무 '수'자를 붙여 '팽수박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이게 다 창원의 '우영우팽나무' 덕분이려나.너무 유명해진 그 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를 앞둔 며칠 전에는 그 일을 담당하는 문화재청의 한 연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데 나와서 '우영우팽나무'에 대해 전공자로서 자랑 좀 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팽나무가 얼마나 멋진 나무인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이미 모두가 다 알게 되었는데 내가 할 이야기가 뭐가 더 있나 싶어 정중히 사양했다. 대전 정부 청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선배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급자가 요즘 팽나무 관찰하는 일에 빠졌다고 운을 떼며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청사 산책길에 만난 팽나무 가로수 열매가 왜 붉은 계열이 아니고 노랗거나 검은색이냐고 물으면서. 좀풍게나무였다.팽나무 열매는 녹색으로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서울 근교로 이사한 고향 친구가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내 묻는다.불암산에서 진달래를 보았다고, 우리 어릴 때 꽃 꺾어 놀던 진달래가 왜 색이 바랜 채 이제야 꽃을 피운 거냐고, 아픈 건 아니냐고.나는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아, 그건 진달래가 아니고 진달래랑 형제 식물인데, 일찍 꽃 먼저 피는 진달래와 다르게 늦봄에 잎을 다 내밀고 옅은 분홍색 꽃을 피우지. 그게 바로 '철쭉'이야.철쭉. 한자로 머뭇거릴 척(躑)에 머뭇거릴 촉(躅)이 변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약간의 독성이 있는 철쭉을 뜯어 먹은 양들이 똑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대는 모습을 본 중국의 유목민들이 붙인 이름이다.항간에서는 꽃이 발걸음을 붙잡는다고 해서 척촉이 되었다고도 한다.그만큼 꽃이 너무 예쁜 식물.예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고 뭐랄까 차분한 색감 때문에 다소 우아한 분위기가 있고, 잎을 다 내밀고 느긋하게 피어서인지 여유로움이 근사하게 배어나는 꽃나무가 철쭉이다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성주군 월항면 지방리 730번지, 지방삼거리 아래 도로변 쉼터에 훤칠한 정자목 한 그루가 서 있다.아까시나무로는 보기 드문 크기와 수형을 자랑하는데, 이 나무가 바로 한국 최고령의 아까시나무이다.성주 지방리 아까시나무는 수령 130년, 나무 높이 20m, 가슴높이 둘레 4m 정도이다.1991년 12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흔히 ‘아카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잎을 다 떨군 활엽수가 사는 겨울 숲에서 눈에 확 띄는 나무들이 있다.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처럼 마른 잎을 땅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달고 서 있는 참나무류들이 바로 그들이다.이 계절에 나목과 상록수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들 모습은 숲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곤 한다.그 풍경이 환하지만은 않다는 게 좀 아쉽다. 버석하게 말라서 뒤틀린 잎은 어쩐지 처연해 보이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차츰 떨어져 부쩍 수척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로수로 즐겨 심는 대왕참나무도 마찬가지다.빨리 자란다는 이점을 극도로 부각해서 미국은 자국의 대왕참나무를 세계 각지에 많이 팔았다.국내에도 도입되어 최근 조성된 서로 다른 신도시에는 거의 같은 연령대의 대왕참나무가 우후죽순 식재되었다.경북도청이 들어서며 새롭게 조성된 도시에는 심은 지 몇 해 안 된 대왕참나무가 요즘 말라비틀어진 잎을 달고 줄지어 서 있다.그 가로수 길을 걸을 때면 나는 우리 숲의 감태나무가 자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종잡을 수 없는 ‘코시국’에도 어느덧 12월이다. 어김없이 전국의 스키장이 속속 개장 소식을 전한다.많은 이들이 기다렸던 소식일 테지만 나에게는 그 시즌오픈이 반갑게 들리지 않는다.누군가의 희생으로 생겨난 장소가 스키장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스키장을 만들면서 우리는 그 땅에 살던 침엽수를 너무 많이 죽였다.침엽수가 누구던가. 편의상 우리는 ‘바늘잎’을 가진 나무를 침엽수, ‘넓은잎’을 가진 나무를 활엽수라고 구분해서 부른다.그들을 나누는 식물학적 기준은 잎이 아니라 생식기관에 있다.장차 씨앗이 될 밑씨를 보호하는 기관인 ‘씨방(子房)’이 있느냐 없냐는 것. 밑씨를 꽃잎과 꽃받침이 겹겹으로 단단히 감싸서 보호하고 있는 식물을 묶어서 피자식물이라고 한다.백합과 장미와 벚나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꽃이 피는 식물이 여기에 해당한다.반대로 씨방이 없이 밑씨를 드러낸 채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잉태하는 무리가 나자식물이다.씨방과 꽃잎과 꽃받침이 없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낙지다리’와 ‘쇠무릎’은 어떤 동물의 신체 부위만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우리 땅에 저절로 자라는 자생식물의 정식 이름이다.실제로 그 모양을 살펴보면 전자는 연체동물인 ‘낙지’의 ‘다리’를, 후자는 포유류인 ‘소’의 ‘무릎’을 꼭 빼닮았다.예로부터 부르던 이름을 별도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채택한 것이다. 자생식물 낙지다리는 아시아의 습지대에 널리 퍼져 사는 여러해살이풀이다.어른 키 절반 정도로 곧추서 자란다. 꽃은 한여름에 산낙지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핀다.가을이 오면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가 붉게 익어 마치 익힌 낙지다리처럼 된다.이렇게 불콰하게 물든 낙지다리가 군락을 이룰 때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룬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설악산과 월악산을 비롯하여 백두대간의 산정에 내로라하는 단풍 명소가 있다면, 낮은 땅 습지에는 낙지다리가 이룩한 가을의 군무가 있다.낙지다리는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습지 주변에 산다.드넓던 습지가 거대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향유가 지천으로 피었다.가을이 왔다는 뜻이다.쑥이나 서양민들레처럼 애써 가꾸지 않아도 민가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게 향유다.꽃이 화려하지 않아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는 않는다.그 대신에 특유의 향기로 향유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추석에 찾아간 엄마 계신 고향 집 마당에도,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들렀던 예천보건소 언저리에도, 그리고 ‘좀풍게나무’를 조사하러 갔던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에도 향유가 피어 너울너울 향기를 내고 있었다.식물 전체에서 강한 향기가 난다고 해서 이름도 ‘향유(香薷)’다.나물로 먹기도 해서 옛사람들은 먹을 ‘여(茹)’자를 붙여 ‘향여(香茹)’라고도 했다.동아시아를 비롯하여 히말라야와 유럽에도 널리 자라는 향유는 먼 옛날부터 인류가 약용식물로 널리 이용해왔다.조선 초기에 발간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에 향유가 등장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 이전부터 향유를 국산 약재로 다루었을 것이라고 본다.'향약채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가을에 한반도 남도의 제철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무화과가 아닐까 싶다.이 무렵 신안 장산도에서 목포를 지나 부산까지 이어지는 국도 2호선에는 그 근방에서 수확된 무화과를 파는 노점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특히 영암군은 국내 최대 무화과 산지로 유명하다.최근 온난해진 기후는 국내의 무화과 재배지를 충북까지 끌어올렸다. 무화과나무는 서양에서 아주 먼 과거부터 재배한 지중해 원산의 유실수다.우리 땅을 비롯하여 동양에는 무화과와 형제 뻘인 ‘천선과나무’가 있다.우리는 무화과나무를 잘 알지만 토종 무화과라고 할 수 있는 천선과나무는 잘 모른다. 무화과는 성경에 수차례 등장하면서 신성한 과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천선과는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이라는 뜻인데 열매의 크기와 식물의 체구가 작은 편이라 중국에서는 ‘작은천선과(矮小天仙果)’라고 부른다. 1988년부터 1991까지 경남 창원의 다호리 고분 발굴 당시 천선과로 추정되는 열매가 나와서 고고학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밤이 되어야 활짝 피는 꽃이 있다.우리에게 익숙한 달맞이꽃이 그렇고 박꽃이 그렇다.이들이 밤에 속을 활짝 열어 보이는 건 ‘꽃가루받이’ 때문이다.그 거룩한 잉태를 성사하기 위하여 꽃은 그들 사이의 매개자로 곤충을 불러 모은다.‘박각시나방’은 그래서 ‘박꽃’을 찾아오는 ‘각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박각시가 박꽃에 날아드는 여름밤의 풍경은 일찍이 백석이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림처럼 완성해 놓았다.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떠날 채비를 하는 이 무렵에 읽으면 그의 시는 나를 다시 한여름 밤의 어떤 장면 속으로 데리고 간다.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강
【뉴스퀘스트=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2021년 여름 더위가 사납다.언제부턴가 나는 더울 때 ‘석호’를 찾게 되었다.'서코-'하고 부르면 동그스름해지는 내 입술 모양처럼 오목하게 팬 바닷가의 호수가 내 앞에 선연하게 펼쳐지니까.강릉 경포대의 경포호,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 고성의 송지호와 화진포호……그들 모두가 석호다. 수만 년에 걸친 지구의 활동이 오대양 해안선의 13% 면적에 석호라는 곳을 만들었다.주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적은 곳이다.한반도에는 동해안에만, 강원도와 함경남도에 48개의 석호가 있다.대륙의 상류에서부터 하천을 타고 도착한 퇴적물, 파랑과 조류가 만든 해변의 모래톱, 산호가 켜켜이 쌓아 올린 산호초…그들의 세월이 쌓이고 쌓여 석호의 둘레가 되었다.둘레를 얻은 석호는 그 안에 물이 괴어 거울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하고 싱크홀 같기도 한 호수와 늪과 못을 바닷가에 만든 거다. 석호의 퇴적작용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완전히 봉쇄되지 않아서 바다와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간살이 곳곳에 빠지지 않는 나무 하나가 있다.식물 공부를 시작하기 훨씬 전에 그 사실을 나는 할머니에게서 듣고 배웠다.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집은 울섶을 따라 이어지는 대문도 싸리를 엮어 만들었지. 할머니의 싸리나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나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나오는 싸리나무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자랐다.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도 훌쩍 지났지만 싸리꽃 피는 여름이 오면 그이가 들려주던, 싸리나무 가득했던 살림살이 풍경이 내 앞에 복원되곤 한다.우리네‘살이’에서 얻은 이름 ‘싸리’. ‘살다’의 어근인 ‘살-’에 접미사 ‘-이’가 붙어 파생된 ‘살이’라는 말이 또 한 번 가지를 쳐서 우리 나무 이름 ‘싸리’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싸리 가지를 엮어 만든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면 벗어둔 지게가 서 있다. 싸리로 짠 발채가 지게에 얹혀있고 땔감으로 쓸 싸리 서너 단이 묶여 그 안에 들어가 있다.싸리로 초벽을 얽고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핵과 식물이 과육의 즙을 늘리는 계절이다.장마가 과즙의 단맛을 빼앗아 가기 전에, 살구와 앵두와 복숭아와 자두를 부지런히 맛보는 이맘때를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사러 면소재지의 오일장에 꼬박꼬박 때맞춰 나가고 있고 요 며칠 개살구를 맛보러 거의 매일 뒷산에 오른다. 개살구나무(Prunus mandshurica)는 우리 산야에 저절로 나는 자생종이다. 중부 이북의 깊은 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극동 러시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자란다. 그들의 분포가 말해주듯이 비교적 북방을 선호하는 편이다.반면에 살구나무(P. armeniaca)는 한반도 전역에서 심어 기르는 중국 원산의 외래종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살구나무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살구나무는 오랫동안 우리의 삶 안에서 넓고 깊이 사랑받아 온 나무다. 하지만 개살구나무는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만 할 뿐 그 정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장미의 오월이 가고 수국의 유월이다. 지금은 수국의 시간. 곳곳에서 수국 꽃소식이 안부처럼 오고 간다. 우리 선조들은 수국을 수구(绣球) 또는 수구(繡球)라고 기록했었다.자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꽃이 둥글게 핀다는 뜻이다.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조선 후기의 사물을 기록한 유희의 '물명고(物名攷)'에도 수국이 아니라 수구라고 적혀 있다.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며 식물명을 정리하던 시기에 일본 이름을 따라 수국(水菊)으로 부르게 되었다.그 이름처럼 물을 좋아하는 꽃이다. 수국은 우리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자생식물이 아니다.원산지는 일본. 일찍이 일본에서는 다양한 수국 품종이 개발되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비롯하여 북반구 전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자신이 자라는 환경을 깐깐하게 따지지 않고 무던하게 뿌리를 내어 금세 몸집을 불리기 때문에 수국은 예부터 정원 식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오월의 끝자락에 울릉도에 왔다.근 십 년 만이다.그전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왔었다.내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던 식물분류학연구실은 울릉도와 독도의 식물을 대상으로 섬 식물의 진화를 탐구하던 곳이었다.연구실 입구에는 호실을 알리는 숫자와 ‘울릉도·독도연구소’라는 이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학위 과정 동안에 울릉도와 독도를 수차례 오가며 그곳의 식물상을 밝히고 독도에 사는 우리 고유식물 3종을 찾기도 했다.이름도 예쁜 섬초롱꽃과 섬기린초와 섬괴불나무를.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원도로 일자리를 옮기면서 나의 연구 주제는 자연스레 내륙의 식물들에 초점이 맞춰졌다.그러는 동안에 나는 울릉도를 잊고 지냈는지도 모른다.상기된 마음을 좀처럼 가눌 수 없었던 울릉도 첫 입도의 순간을 기억한다.툭하면 뱃길이 끊겨 출항의 기약 없던 그 섬에서 식물 탐사에 매달렸던 시간, 낯선 섬 식물의 종류와 실체를 정확히 알기 위해 고투했던 낮과 밤의 시간……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지난 5월 14일은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다.전국의 낮 기온이 30도를 넘었다.강원도 영월은 5월 중순 기준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고 기상청은 전했다.그날 나는 영월에 있었다. 줄댕강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줄댕강나무는 영월과 단양과 제천의 석회암 지대에서 자라는 한반도의 고유식물이다.북한에서 석회암 지대로 유명한 평안남도 맹산에도 자란다.나뭇가지가 댕강하고 잘 부러진다고 댕강나무라 하고 땅속 뿌리줄기가 줄줄 달려서 번식하기 때문에 접두어 ‘줄’을 붙였다.댕강나무와 줄댕강나무는 같은 식물이다.분류학적 정보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이들을 구분해서 불렀던 적이 있었다.수피에 6개의 골이 있으면 줄댕강나무, 그 골이 뚜렷하지 않고 잎이 조금 더 크고 수술대에 털이 있으면 댕강나무로 구분했던 것.이는 하지만 생태적 표현형이거나 변이일 뿐 과거에 구분했던 두 종을 동일한 종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식물학계의 평가다.줄댕강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낭독이 발견되었다.남한에서는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약용식물 낭독을 국립수목원 연구진이 2020년에 강원도 어느 깊은 산에서 비로소 찾아냈다.1964년 평창군 월정사에서 발견된 이래로 자취를 감춘 탓에 국내에서 완전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낭독이 생존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강원도 어느 깊은 그 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과 작년에만 내가 몇 번의 조사를 다녀온 곳이다.왜 나는 그때 보지 못했던 걸까.허투루 다녔던 것은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년 채집 기록을 뒤져본다.타이밍이 낭독을 만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낭독은 일찍이 4월 중순에 꽃을 피워 이내 열매를 맺은 후 여름이 오기 전에 몸을 녹여 숲에서 스러지곤 한다. 작년에 나는 그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거였다. 식물의 일도 사람의 일도 역시 타이밍이 관건이다. 올해 들어 세운 목표 중 하나가 낭독을 만나는 거였다.그래서 나는 4월 25일에 그 산으로 향한다. 낭독의 발견을 위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진 시절이다.다시 모여 살기 위해 인류는 지금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집단면역을 기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식물들도 아주 오랜 과거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며 지구에서 생존해 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모이거나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한반도에만 모여 사는 ‘모데미풀’이라는 식물이 있다.일본인 식물학자 오휘(Jisaburo Ohwi)가 1935년에 지리산 운봉 모데기마을에서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식물이다. 북쪽으로 운봉읍을 잇는 길과 남쪽으로 지리산 달궁계곡을 잇는 길이 모이는 모데기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의 중간쯤에 있다.억새로 이은 초가지붕을 만날 수 있는 남원의 주천면 덕치리의 모데기마을은 한자식 이름 표기에 따라 지금은 회덕(會德)마을로 불린다.새로운 식물을 처음 발견할 당시의 지명을 받아 적어서 모데미풀이라 이름 지었던 것인데, 옛 지명이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을 공부하는 일이 참으로 보람된 일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들꽃의 삶과 산꽃의 삶을 구분할 수 있고 그들의 시선에서 식물의 분포를 예측하는 감이 생긴 것,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로 구별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 그들 가운데 맛있는 풀과 맛이 별로인 풀을 나름 객관적인 잣대로 분별해내는 미각을 얻은 것, 특히 몸에 좋은 약초와 그렇지 못한 독초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요즘 비건 선언 소식이 부쩍 늘고 있다.우리 산과 들의 나물들은 부지런히 새순을 내며 동물성 식품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냉이와 쑥과 달래는 봄의 전언과 같은 그 향기로, 고들빼기와 민들레와 씀바귀는 특유의 쌉싸름함으로, 두릅나무와 음나무(개두릅)와 독활(땅두릅)의 새순은 각기 다른 연둣빛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식물들은 겨우내 농축한 에너지를 저마다 지상에 꺼내 놓는다. 대체로 익숙한 들판의 봄나물과는 달리 특정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경칩과 춘분의 중간쯤 되는 날 정오에 외씨버선길을 걷는다.청송에서 시작해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영월에서 끝나는 이 길은 전체를 이은 모양이 외씨버선을 닮았다.길은 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을 사뿐히 지나가기 때문에 그의 시 '승무'에 등장하는 ‘외씨버선’을 이름으로 얻은 것도 같다.전체 13코스 중 내가 걷는 ‘외씨버선9길’은 소나무가 순림으로 펼쳐진 춘양목솔향기길이다. 식물은 태양이 지구를 비추는 시간을 동물보다 더 빨리 체감한다.숲길에 만난 나무의 겨울눈이 전보다 부풀었다. 밤보다 낮이 길어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겨울눈이 나무의 심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생명이 나무의 뿌리 그 깊은 곳에서부터 쉼 없이 박동하고 있으니까요. 뼈와 근육과 혈관을 켜켜이 쌓아 심부를 단단히 지키는 저 유기적 결합체가 심장이 아니라면 무어라 말해야 하나요. 나무의 눈이라는 것은 분열하고 발달하여 장차 잎이나 꽃이 되는, 한 식물체의 기
【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2021년 2월 7일 일요일 오후 2시.경북 봉화의 최북단 작은 마을에서 두꺼운 외투 없이 밖으로 나선다.마당 가 유독 볕이 오래 머무는 자리에는 꽃다지와 쑥과 망초가 벌써 싹을 냈다.밭둑에 바짝 붙어 자라는 물오리나무의 수꽃자루는 내 송곳니만큼 길어졌다.산책길의 따뜻한 오후 볕이 춘분처럼 너그럽구나, 혼자 중얼거린다.그런데 내 마음은 왜 계속 조급해지는 걸까.이른 봄 남쪽으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식물들이 태동을 시작한 것이다.해는 기울고 오늘 남도의 한낮 기온이 15도를 넘었다는 소식에 내 마음은 자꾸만 남쪽으로 기운다.2021년 2월 15일 월요일. 오전 8시. 눈이 온다.어려서도 커서도 눈이 내리는 날은 하염없이 좋다.하지만 눈이 쌓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도 가도 못 하게 길을 자꾸만 지워서 나를 난처하게 만드니까.눈을 치우다 말고, 남도 날씨 소식에 귀가 왕팽나무 겨울눈처럼 쫑긋, 하고 선다.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