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웨이잉 교수는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중국의 대표적 경제학자다. 베이징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사진제공=신징바오(新京報)]
장웨이잉 교수는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중국의 대표적 경제학자다. 베이징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사진제공=신징바오(新京報)]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중국은 누가 뭐래도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아무리 ‘자본주의 인간형’을 대표하는 민족이라고 해도 정체는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현재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주창하는 대표적인 경제 정책 슬로건인 ‘공동부유‘는 정체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해야 할 오피니언 리더들이라면 열심히 이를 홍보하고 지지해야 한다.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없지는 않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의 장웨이잉(張維迎. 66) 교수라고 할 수 있다. 공동부유와는 완전히 반대 개념인 시장경제를 지난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부르짖은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역사로 남을 수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공동부유와는 180도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 먼저 부자가 되자)’의 주창자, 다시 말해 중국의 골수 시장주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그는 시 주석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위린(楡林)시 우부(吳堡)현 신좡(辛莊)촌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정말 깡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을 여건이 아니라고 단언해도 좋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유치원에 다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게다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1966년에는 문화대혁명(문혁)의 발발로 거의 모든 학교도 문을 닫았다. 초등학교에 간다는 것 역시 사치였다. 문혁 막내 세대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어려 선배들이 했던 중노동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독학 등으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동년배들보다 대단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들은 것은 당연했다. 중국 내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 칭화(淸華)대학 진학은 식은 죽 먹기라는 말 역시 들었다

그는 하지만 주위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결정할 때 고향 인근의 시베이(西北)대학 진학으로 눈을 돌렸다. 집안에 아들을 베이징에서 유학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봉황이 놀기에는 좁은 바닥인 시베이대학에서 펄펄 날았다. 경제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는 것은 진짜 일도 아니었다. 1982년 학사, 84년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영국에 유학, 94년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후 그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 밟아보지 못한 베이징대학에 곧바로 초빙돼 중국경제연구센터 부교수로 부임했다. 이어 광화(光華)관리학원 교수를 거친 다음 원장으로 일했다. 총장보를 거친 지금은 시장과 네트워크경제연구센터 주임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고장이라고 해도 좋을 영국에서 10여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듯 평생을 시장경제에 천착해왔다고 해도 좋다. 현 시진핑 주석 정부가 추진하는 ‘공동부유’ 슬로건 하의 경제 정책들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사사건건 이론적으로 부딪히고 있다.

그가 엄청난 스펙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중용되지 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탄압을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대표적인 논문인 ‘시장경제와 공동부유’를 비롯해 ‘중국경제 50인 포럼’ 등의 글은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금기시돼 있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해 웨이보(微博)를 비롯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세를 탔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논문들이 지금도 활발한 토론의 주제도 되고 있다. 그의 관점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이 상당히 많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그는 그럼에도 기업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아니 알리바바의 창업자인 마윈(馬雲)을 혹독하게 비난해왔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성향이 진보적 시장경제주의자에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런 성향 탓에 마윈과는 지금도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고 한다.

아직까지 경제학자와 기업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때는 2009년이었다. 당시 마윈은 국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이 매년 연말 시상하는 ‘중국 10대 경제인물’ 시상식에 참석, 평소 이를 갈고는 했던 장 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장 교수가 가르치는 MBA나 EMBA 과정을 통해 배출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MBA의 존재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장 교수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상을 받은 리닝(李寧)스포츠의 리닝이 바로 베이징대 EMBA 출신으로 유명하다. 스포츠업체인 리닝의 성장은 광화관리학원에서의 공부와 떼놓을 수 없다.”고 되받아쳤다. 장 교수가 판정승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2012년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마윈은 이때 자신이 주최한 알리바바 전자상거래업체 대회에서 “만약 기업가들이 경제학자들의 말을 듣는다면 이들 중 절반은 이미 망했을 것이다.”라면서 경제학자 무용론으로 장 교수를 재차 저격했다.

장 교수는 이때도 “만약 기업가가 경제학자의 말을 듣고 망했다면 그건 그 기업가가 아직 진정한 기업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라는 말로 마윈의 코를 다시 한 번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베이징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기업가들과 창업 희망자, 학자들 수천여 명을 제자로 배출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가 “전 중국에 장 교수의 영향을 받은 재계 및 학교 오피니언 리더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영향력이 막강하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용되지 못하기는 해도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 영향력 막강한 파워 엘리트라는 평가를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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