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제도 도입 20년, 대부분 개인이 운용하는 DC형 가입 민간운용사만 배불려
전문가들 "연금 선진국처럼 국민연금 같은 '공적 운용기관' 설립, 제도개선 서둘러야"

【뉴스퀘스트=최석영 기자 】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째를 맞아 여러 논란입니다. 대표적으로 중도 인출과 운용 수익을 둘러싼 것인데요. 국민연금처럼 공적 운용기관을 만들어 수익률을 관리하고, 중도인출도 까다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는 사용자에게 보험료의 절반을 납부토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법정 연금입니다. 이 때문에 사업주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1년 이상 고용한 노동자 월 소득의 8.33%를 외부 민간 금융회사에 퇴직연금으로 적립해놓아야 합니다. 사용자가 적립하는 금액 가운데 절반(본인의 월 소득 중 4.16%)은 노동자가 적립하는 몫입니다. 노동자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에 따라 무조건 퇴직연금에 가입하도록 강제해 놓은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정부는 가입자 각자에게 투자책임을 맡기는 등 관리 운용 측면에서는 손을 놓고 있습니다. 퇴직연금 운용에서도 정부가 공적인 성격의 기관을 만들어 어느 정도의 수익률을 책임지고, 민간의 운용을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최근 퇴직연금에 오래 맡겨봤자 큰돈이 안 된다는 인식으로 중도에 해지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퇴직연금 수익률이 높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로 보입니다.

/일러스트=뉴스퀘스트, 자료사진=KB국민은행 블로그, 픽사베이
/일러스트=뉴스퀘스트, 자료사진=KB국민은행 블로그, 픽사베이

◇ 퇴직연금 운용수익률 10년 평균 1.93%, 다른 기금 절반도 못 미쳐

국민연금연구원의 이동화·이예인 연구원은 지난 9월 발표한 ‘퇴직연금제도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 확대를 위한 대안 분석’ 연구보고서를 통해 “퇴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 강화를 위해선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극히 저조한 투자수익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정부와 금융당국이 발표한 2023년 자료를 보면 2022년 수익률은 0.02%에 그쳤으며, 5년, 10년 평균 수익률도 각각 1.51%, 1.93%로 매우 낮았습니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 다른 공적 연금들이 2015년부터 2022년까지 8년간 5% 안팎의 연평균 수익률 성과를 달성한 것과 비교하면 3~4%포인트나 낮은 수치입니다.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이 국민연금 등 주요 공적연금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적립금을 은행예금 등 ‘원리금 보장형 금융상품’에 주로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2023년)에 따르면 퇴직연금제도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투자 비중은 88.7%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주요 공적연금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위험자산(국내 주식, 해외주식, 대체투자) 투자 비중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구진은 이처럼 원리금 보장형 상품 중심의 투자행태가 지속되는 원인은 가입자의 투자에 대한 무관심을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 퇴직연금 중 근로자 개인이 운용책임을 지는 확정기여형(DC; Defined Contribution)의 경우 가입자의 83%는 1년 동안 상품을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2023년 퇴직연금 통계 결과. /자료=통계청
2023년 퇴직연금 통계 결과. /자료=통계청

◇ 적립금 투자·관리 ‘기금형 중개조직’ 만들자

연구진은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을 별도의 전문 운용조직이 책임지는 ‘기금형’ 중심으로 운용 지배구조를 바꾸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퇴직연금이 발전한 서구 국가들은 가입자를 대신해서 적립금을 관리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전문성을 갖춘 별도의 ‘중개 조직’이 있습니다.

전문가로 구성된 중개 조직이 가입자를 대신해서 적립금을 관리·운용 하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민간 금융기관)를 상대하는 것을 ‘기금형’이라고 하고, 중개 조직을 거치지 않고 가입자가 직접 퇴직연금 사업자를 상대해서 투자상품을 선택하는 것을 ‘계약형’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계약형입니다. 2005년 12월 퇴직연금 제도 시행 때 초기에 가입을 확산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활용하는 계약형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계약형은 투자 정보가 부족한 사용자나 근로자가 각자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해야 하다 보니, 위험성과 변동성 높은 실적 배당형 상품에 투자했다가 자칫 원금마저 까먹을 걱정 때문에 대부분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골라서 장기간 방치해놓기 일쑤입니다. 그렇다 보니 수익률이 낮은 것은 당연하죠.  

반면 기금형 퇴직연금은 계약형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기금형은 공공기관이든 민간기관이든 대형 중개조직이 가입자의 적립금을 모아서 기금을 만들고, 이를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만큼 정보 비대칭에 따른 가입자의 투자정보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뿐더러, 규모의 경제 이익을 실현해 투자 수익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퇴직연금은 기금형만 있거나 기금형과 계약형이 모두 있는데, 둘 다 있는 경우에도 기금형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이러니하게 법제화된 퇴직연금 제도를 가지고도 기금형이 없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연구진은 “퇴직연금제도가 발달한 호주의 경우 기금형 지배구조로 이뤄졌으며 가입자가 투자상품을 직접 선택하지 않으면 연기금에서 설정한 디폴트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 운용된다”면서 “정부가 디폴트 상품을 관리·감독하며 공시 시스템을 강화해 가입자가 투자의사 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현재 민간 금융기관만 사업자로 참여하고 있는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 국민연금공단 같은 공공기관이 기금형 사업자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23년 퇴직연금 통계결과. /자료=통계청
2023년 퇴직연금 통계결과. /자료=통계청

◇ 정부 중도인출 까다롭게 제도 개선…구체안은 미정

정부는 퇴직연금이 실질적 노후 소득 보장 기제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도 인출을 까다롭게 하는 등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지난 23일 발표했습니다.

연금 개혁 추진계획을 통해 일시금이 아닌 ‘연금’ 수령으로 퇴직연금이 실질적으로 노후생활에 활용되도록 불필요한 중도 인출 요건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게 요지입니다.

다만 중도 인출이 주로 주택구입과 관련된 점을 고려할 때 제도적으로 인출을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적립금을 보전하면서 주택구입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적립금 담보대출’은 최대한 허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는 DC형만 중도 인출이 가능한데, 사유도 주택구입, 주거 임차, 6개월 이상 장기 요양, 파산 선고, 회생절차,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피해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2023년 퇴직연금 통계’를 보면 DC형 퇴직연금 중도 인출 인원은 6만4000명, 인출 금액은 2조4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전년보다 인원은 28.1%, 금액은 40.0% 각각 늘어난 수치입니다. 사유별로는 52.7%(3만3612명)가 주택구입 목적으로, 27.5%(1만7555명)은 주거 임차를 사유로 퇴직연금을 미리 당겨썼습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도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퇴직연금의 취지를 살리려면 중도 인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안이 꼭 필요하다고 주문합니다.

한 전문가는 “중도 인출 조건을 재구성하는 등 근본적 해법이 필요하다”면서 “중도 인출 사유를 해외 연금 선진국처럼 영구장애, 과도한 의료비, 주택 압류 등 '예측 불가능한 경제적 곤란 상황'으로 엄격하게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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